본문 바로가기

책 리뷰

그냥 좀 괜찮아지고 싶을 때 - 이두형

728x90

그냥 좀 괜찮아지고 싶을 때

이두형

책 읽으러 가기

책속에서

남몰래 좋아하던 이와 갑자기 마주쳤다고 해서 심장이 멎는 것은 아니다(그런 느낌은 들 수 있다). 시험을 망친다고 해서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삶의 무게에 지치다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이나 생각과 연계되어 작동하는 교감신경의 작용은 퍽 곤란할 수 있다. 짝사랑하는 이를 때리거나(fight) 시험에서 도망칠 수는(flight)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다만 오염이 지나쳐 물의 자정 능력을 넘으면 돌이킬 수 없이 더러워진다. 이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수용 가능한 좌절, 견뎌낼 만한 슬픔을 넘어서는 절망이 찾아오면 마음도 스스로를 다독일 능력을 잃는다. ‘굳게 마음을 먹어도’ 이겨내기 힘든 고통은 있다.

불안은 삶의 불확실성을 ‘통제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조금 더 상세히 말하자면,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것과 그러지 못한 것을 구별하지 않고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것 마저’ 모두 통제하려는 마음이 불안의 씨앗이 된다.

‘걱정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마술적 사고’는 그때 내 마음을 설명하는 꽤 그럴싸한 해석이었다. 나는 불안했던 것이다. 뒤처지지 않으려 열심히 해야 할 일을 해도 모자랄 시간에 한눈을 팔고 딴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래서 ‘걱정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걱정은 ‘해야 할 일’에 ‘항상’ 신경을 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게 마음이라도 쓰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 같았고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방어기제는 나 자신의 성숙도를 가늠하는 지표가 아닌 내가 추구해야 할 이정표로 사용하는 편이 좋다. 즉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다른 재밌는 일을 하며 ‘부정’해버리기 보다는 미리 ‘예상’하고 대처하거나, 타인과의 갈등을 상대의 잘못이나 미숙함 탓으로 ‘투사’하기보다는 ‘유머’로 부드럽게 풀어내려 노력하는 것이다. 처음엔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고 불편할 수도 있지만 마치 귀찮고 고된 운동이 건강을 가져다주는 것처럼 성숙한 방어기제는 좀 더 나은 삶을 가져다줄 수 있는 도구다.

세상에 화가 나더라도 우리는 함부로 삶에게 대들 수 없다. 냉정한 세상에서 성질대로 살면 치러야 할 대가가 만만치 않기에 압박 면접을 버티고 상사의 모욕을 견디며 진상 손님의 악을 받아낸다. 대신 우리는 소심하게 성질 낼 방법을 찾는다. 상사가 어렴풋이 말 거는 듯했지만 못 들은 척한다. 짜증나는 손님의 주문을 까먹고(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수준에서 ‘진짜’ 까먹는다) 늦잠을 자 면접 시간을 놓친다. 미루기를 비롯한 수동 공격 행동은 작은 일탈이다. 삶을 지나치게 망치지 않는 선에서 우리는 교묘하게 삶에 저항하는 시늉을 한다.

과감한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 길이 생각했던 길이든 그렇지 않은 길이든, 꾸준히 그 길 위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마음속에 묘한 생각이 자라난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혹은 시작을 하지 않으면 ‘아직’ 기회가 남아있는 듯한 느낌이다. 막상 선택을 하고 최선을 다했으나 원하는 결과가 주어지지 않을 때의 상실감이 두려운 것이다. 선택을 하지 않으면, 시작을 하지 않으면 적어도 해낼 ‘가능성’은 남아 있는 것이다. 전력을 다해도 도달하지 못할 때의 허탈함이 지레 겁이 날 때, 선택하지 않았기에 역으로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어 안심이 될 때, 우리는 선택을 주저한다.

내가 지금 보고 느끼는 감정과 생각이 온전히 지금의 사건 때문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아는 것, 과거의 기억과 생각, 감정에 여전히 사로잡힐 때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때와 다른 지금은 더 이상 그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낀다면, 도무지 어찌할 수 없을 것 같던 불안과 슬픔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상화와 평가절하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경향들이 편안한 관계를 이어가는 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이상화에서 비롯된 무한한 기대는 상대에게 부담을 안길 테고, 평가절하로 인한 폄하는 불쾌함과 억울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내게 달리지 않은 결과에 대한 고민은 불안을 부른다. 쉽진 않겠지만, 미래에 벌어질 일에 대한 마음을 비우면 지금 내가 할 일이 보인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타인을 억지로 내 곁에 둘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자꾸만 다른 사람이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할까 봐 두렵다면 불안한 생각의 주어를 ‘나’로 바꾸는 연습을 해보자.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해’를 ‘지금 내가,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구나’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안 좋게 볼 거야’를 ‘내가, 다른 사람이 나를 안 좋게 볼까 봐 걱정하는 구나’로. 말장난 같지만, 이렇게 주어를 바꾸다 보면 지금 느끼는 두려움이 ‘팩트’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자라난 ‘주관적인 불안’임을 조금씩 깨닫게 될 것이다.

“우울한 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면 좋을까요?”
“그냥 들어 주세요. 그 사람과 상황을 판단하진 마세요. 그리고 곁에 있어주세요.”
상투적인 결론이지만 꽤 효과가 있을 것이다.

보통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확신할 만한 이유를 찾는 데 익숙하여 반대의 이유를 살펴보는 일을 등한시 한다. 그 생각이 강렬한 감정(사랑, 분노, 불안, 좌절 등)과 결부되어 있다면 더욱 그렇다. 마음이 어지러울수록 침착해야 한다. 호흡의 속도를 늦추고 감정의 불길을 가라앉히고 찬찬히 돌아보는 것이다. 물론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감정이 계속 활활 타오를 때 딱 하나 이 질문을 떠올려보기를 권한다. ‘진짜 그런 걸까?’ 억지로 좋은 쪽으로 볼 이유는 없다. ‘이 생각이 전부 맞는 걸까?’라는 질문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순간 1퍼센트라도 아닐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일단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스트레스 때문에 먹는 치킨으로 살이 쪄 더 스트레스를 받고, 사람이 부담스러워 관계를 피하다보니 사람이 더 부담스러워진다. 어떠한 부정적인 감정이나 상황을 회피하고자 하는 행동들이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감정을 상하게 하고 상황을 악화시키기도 한다. 이는 또다시 힘든 마음을 달래기 위해 부적절한 보상 행동을 반복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끝이 나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 수용전념치료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갇힌 고리(stuck loop)’라 한다.

레지던트 시절 은사님께서는 이런 표현을 쓰셨다. “마음챙김은 결국 판단을 미루는 것이다.” 힘든 일을 겪으며 은연중에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을 반복하진 않는지 혹은 불편한 감정이나 생각이 마음을 휘젓도록 허락하는 중은 아닌지 돌아보는 것은 마음에 대한 예의이다. 개개인은 스스로가 마음의 주인이다. 소유는 누릴 권리와 함께 가꾸고 돌볼 의무를 수반한다. 때론 자신의 마음을 지켜주고 돌봐주자. 굳이 불편한 생각을 막을 필요는 없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구나,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책을 추천한 크리에이터

이 책을 추천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