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밝게 살고 싶고, 무겁지 않고 싶지만, 나의 삶의 무게는 가볍지도 밝지만도 않다. 그런 그대로를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바라보고, 내가 바라던 대로가 아니라 해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다. 특별함을 꿈꾸지만 평범에 머물고 마는 나의 이야기들이 또 다른 평범과 만나 동그란 원을 그려낼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의 평범은 모두, 우리에게 유일한, 그러므로 특별한, 평범이니까. -11쪽
아이를 낳기 전엔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엄마가 된 사람은 어떤 큰 강을 건너 저쪽 편으로 가버린 사람으로 여겼다. 강 저편의 삶은 뿌연 안개였고, 안갯속을 굳이 들여다보고 싶지는 않았다. 분명한 것은 이곳과는 다른 세상이라는 것. 저쪽으로 건너가야 하는 날이 오겠지만, 그전에는 먼 저곳을 헤아리기보다는 이편의 세상을 즐기리, 뭐 그런 마음이었달까?
그리고 어느 날 내가 강을 건너게 되었다. 와서 보니 안갯속 세상에 대한 나의 어림짐작은 얼마간 맞고, 대부분은 틀렸다.
고립된 기분이었다. 따지자면 내가 스스로 고립된 것인데, 세상이 나를 따돌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차피 세상은 나를 궁금해하지 않았고, 가끔 세상이 궁금해져 들여다볼 때면, 어지러웠다. 내가 탄 기차는 너무도 빨리 달리고 있어서 나는 그만큼 성큼성큼 늙어가는데, 세상은 이런 나를 끼워주지 않고, 아랑곳하지 않고, 스치고 지나가 버린다. 더 반짝이는 곳으로.
내 속도는 세상의 속도에 비해 너무나 느려져 버렸다.
엄마가 되면서 처음 가진 다양한 감정 덩어리들에 이리저리 빛을 비추어 바라보고 싶었다. 그 세계가 얼마나 낯선 세계였는지, 너무도 생경해 당황했던 순간을 기록하고 싶었다.
시시콜콜한 육아 이야기가 어디에 가닿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더라도, 엄마가 되었지만 엄마인 자신이 여전히 낯선, 엄마이기 이전의 삶이 훨씬 익숙한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보고 싶었다. ‘우리, 비슷하게 살고 있죠?’라고/
내 인생에서 계획대로 이루어진 게 별로 없다고 해도, 아기를 가지는 것이 이렇게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인 줄 몰랐다. 계획을 세웠지만 좀처럼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통상 이 정도 자연스러운(?) 계획을 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난임으로 분류한다고 했다. 뚜렷한 난임의 원인을 찾지 못했지만 나이가 있으니 바로 시험관(체외 수정) 시술을 하는 게 좋겠다는 권유를 받았다. 나는 순응적인 사람이다. 알겠습니다, 했다. 그렇게 나의 난임기가 시작되었다.
회사를 나오고 몇 년간 막막하다가 어느 정도 내가 갈 방향을 찾고 나아가던 터에 마침 호빵이 호떡이가 찾아왔으니, 인생이란 참, 원래 이런 거지, 싶었다. 그렇게 나는 겨우 손에 잡은 것들을 정리하고 무사한 출산을 준비했다. 그리고 해냈다. 이젠 숙제 끝, 하고 손 털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놀랍게도, 다시 시작이었다. 출산이라는 업무를 완수했는데 더 어마어마한 다음 단계, 육아가 딱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내 정신이 아니었던 나날들. 육아란, 엄마가 되면 저절로 가능해지는 영역이라고 믿었던 환상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육아는 나의 상상 범위를 넘어서는 무엇이었다. 내가 감당해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루하루 확인하는 나날이었다. 아이를 돌보며 느끼는 감정이란 경탄, 환희, 신비로움 같은 거라고 배웠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런 아름다운 감정보다 더 자주 공포와 무력감과 부담감에 압도당해야 했다.
엄마로 살아 보니, 엄마로 살기란 어떤 것인지 아무리 설명을 잘한다고 해도, 세상에 엄마를 주제로 한 수만 권의 책이 존재한다고 해도 온전히 전할 수 없다. 그냥 엄마가 직접 되어보지 않고서는 알 도리가 없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나도 엄마이기 이전에 ‘엄마 됨’의 무게와 고충과 암담함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착각했었기에.
감정이란 우리의 통제력을 가벼이 넘어선다. 무서워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수 있지만, 노력으로 반드시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험한 말을 던졌던 친구를 미워하는 감정이 그러했듯, 억압하면 더 팽창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감정은 우선,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유를 찾는 건 그다음이다. 무서운 것도, 미운 것도, 화나는 것도 다 옳다. 모든 감정은 옳다. 아니, 옳고 그름이 없이 그저 귀하다. 생생히 살아 숨 쉰다는 확인이고, 감정을 건강히 다루어나갈 방법을 배울 소중한 기회이다.
상담은 두 사람이 만나 관계를 맺는 과정이다. 내담자 문제의 대부분은 그 근원이 어디에 있든 현재의 ‘관계’ 문제로 드러난다. 처음엔 내담자가 바깥세상에서 맺은 그 관계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거듭 만나며 어느덧 그 관계 맺기의 패턴은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서도 여지없이 반복되어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내담자는 ‘알지만, 알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선명히 인식하게 되기도 하고, 때로는 거부하고 싶은 사실 앞에서 몸부림치기도 한다.
울음은 좋은 것이다. 정서 관리에 좋다. 울음이 가진 해소의 힘, 정화의 힘, 위안의 힘을 나는 믿는다. 이것을 더 정밀하게 과학적 수사로 표현하지 못하는 나의 한계가 아쉬울 뿐이다. 가슴이 답답한 건, 울어야 하는 때에 못 울어서고, 시도 때도 없이 화가 나거나 짜증이 올라오는 것도, 충분히 우는 시간을 가지지 못해서다, 라고 나는 정리한다.
나는 그런 축적된 역사를 안고 지금의 나로 자라났다. 지금의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순간이 많다. 그러니 더 마음에 드는 쪽으로 노력해 갖추어나가야 한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배울 수 없고 달라질 수 없는 건 아니니까. 과거를 무시할 수도 없지만, 과거를 붙들고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 또한 없다.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지금이다. 지금의 나다.
상담이란, 한 고매한 인격체가 무지몽매한 한 인간을 구제하거나 개조하려는 것이 아님을 기억한다. 몹시 불완전한 한 인간이, 또 역시나 불완전한 한 인간을 그래도 돕겠다고, 도와보겠다고 다가서는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나는 이제 그렇게 믿고 싶다. 여전히 나의 상담은 실수투성이이고,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제자리를 맴돌고 있지만, 희망은 존재한다고 믿으려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끝내 ‘좋은 상담사’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것임을 확인하기에.
나는 잘 컸고, 물론 더 이상 스스로 ‘잉여로운’ 존재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에 몸에 스며든 그 냄새는 오래도록 남아 나에게 영향을 미쳐왔다고 느낀다. 어쩌면 안정적인 직장인이되 눈에 드러나는 일,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 것도, 또 그 일을 그만두고도 늘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상담사가 되어 내 존재를 내세우려 하는 것도 다 연결된 하나의 욕구라는 생각이다. 내 존재가 잉여가 아님을, 존재할 가치가 있음을 확인받고 싶은 마음.
글을 쓰는 자의 진정성이란 끊임없는 자기 검열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하는 이 말은 나에게 있어 어느 정도 진실한가?’ 스스로 계속 물어야 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이 이야기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전체로서의 어떤 그림을 그려낼 수 있기를 바란다. 완성된 그림 안에는 전보다 조금은 성숙한 인간이 그려져 있기를, 가만히 기도한다.
기억에 남는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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