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로사와 내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우리는 매장 중앙부 잡지 테이블 쪽에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도 창문이 절반 넘게 보였다. 그래서 바깥세상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해가 움직이는 걸 볼 수 있는 운 좋은 날이면 나는 얼굴을 내밀어 해가 주는 자양분을 최대한 많이 받으려했다. 로사가 곁에 있을 때는 로사에게도 그러라고 말했다.
우리와 같이 있던 소년 에이에프(AF) 렉스가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가 어디에 있든 해는 우리한테 올 수 있다고 했다. 렉스가 마룻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해의 무늬야. 걱정되면 저걸 만져 봐. 그러면 다시 튼튼해질 거야.”
때로는 걸음을 멈춘 사람이 우리에게 아무 관심이 없을 때도 있었다. 그냥 운동화를 벗어서 뭔가 하려고 하려거나 혹은 오블롱을 들여다보려고 걸음을 멈출 때도 있었다. 하지만 유리창으로 다가와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주로 아이들, 우리와 가장 잘 맞는 나이대의 아이들이 많이 다가왔는데 우리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혼자, 혹은 어른과 같이 와서 우리를 가리키며 웃고 괴상한 표정을 짓고 유리를 두들기고 손을 흔들었다.
가끔은 아이가 다가와 우리를 보는데, 우리가 마치 무슨 잘못이라도 한 듯 슬픔 혹은 분노가 어린 표정일 때도 있었다. 이런 아이도 금세 돌변해서 다른 아이들처럼 웃거나 손을 흔들기도 했지만, 창문 앞에 선 지 이틀째에 나는 그래도 여러 아이들 사이에 뭔가 다른 점이 있음을 느꼈다.
조시는 행인들이 뒤쪽으로 다 지나갈 만큼 유리창에 가까이 다가온 다음 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보고 웃었다.
“안녕.”조시가 창문 너머에서 말했다. “내 말 들려?”
아이가 나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에 나는 아이를 돌아보고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정말?” 조시가 말했다.
“시끄러워서 나도 내 목소리가 잘 안 들리는데. 정말 내 목소리가 들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조시는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RPO 빌딩 쪽에 다다르자 두 사람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해도 그 모습을 보고는 두 사람 위에 자양분을 한껏 쏟아부었다. 커피잔 아주머니는 여전히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남자가 눈을 꼭 감은 게 보였다. 행복한지 속상한지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저 사람들 만나서 무척 기쁜가 보다.” 매니저의 말에 매니저도 나처럼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네, 아주 행복해 보여요. 그런데 이상하게 속상한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아, 클라라. 너는 놓치는 게 없구나.” 매니저가 조용히 말했다.
매니저는 자리를 뜨려다 말고 다시 몸을 돌렸다.
“그건 아니지, 클라라? 너 누구랑 약속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나는 매니저가 창문에서 거지 아저씨를 보고 비웃은 소년 에이에프 둘을 꾸지람했을 때처럼 나한테도 꾸지람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매니저는 내 어깨에 손을 얹고는 아까보다도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 잘 들어 봐. 아이들은 툭하면 약속을 해. 창가로 와서 온갖 약속을 다 하지. 다시 오겠다고 하고 다른 사람을 따라가지 말라고 해. 그런 일이 수시로 일어나. 그런데 그래 놓고 다시 안 오는 아이가 훨씬 많아. 더 심한 경우는, 아이가 다시 오긴 했는데 딱하게도 기다렸던 에이에프를 외면하고 다른 에이에프를 고르기도 해. 아이들은 원래 그래. 너는 늘 세상을 관찰하면서 많은 걸 배웠지. 이것도 잘 명심해두렴. 알겠니?”
“네.”
“좋아. 그럼 이제 이 이야기는 끝난 걸로 하자.” 매니저가 내 팔을 쓰다듬고 돌아섰다.
헛간 안은 주황색 빛으로 가득했다. 공중에 건초 조각이 저녁 벌레들처럼 둥둥 떠다녔고 마룻바닥 위에 해의 무늬가 퍼져 있었다.
기억에 남는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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