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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 김겨울|박종현|이묵돌|제리|핫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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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김겨울|박종현|이묵돌|제리|핫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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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작가란 원래 망한 원고 위에 짓고 부수고 짓고 부수는 성 같은 것이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다.
다들 그런 식으로 무언가가 된다.
하고, 하고, 또 하고, 또 해서 안 되고, 안 되고, 안 되고, 가끔 조금 된다. 가끔 조금 된다는 게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점이지만 그래도 대개 그런 것 같다. 지금 이 자리에서 글을 쓰고 있는 사람 모두 아마 그런 식으로 가끔 조금 무언가가 된 사람.
무엇인가를 사랑하다 박탈당하고, 무언가에 열중하다가 중단당하기를 반복하며 유일하게 성실하게 쌓아온 게 있다면 그건 망한 원고였다. 정말 ‘망했다’는 의미에서 망한 원고가 아니라, 언제나 그 결과물에서 더 나아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아직도 매번 아쉬워하고 부끄러워하며 글을 쓴다.
- 김겨울, 「가끔 조금」

두 겨울이 지나 월세 계약이 끝나고 나면 더 넓은 방에 갈 수 있을까? 그렇겠지? 아닐까? 버는 것보다 오르는 게 더 빠르겠지? 전세대출은 점점 힘들어진다던데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던 사이, 고양이.
네가 떠올랐어. 나는 어떻게든 2년 뒤에 고양이를 키울 수 있는 사람이 되겠어. 이건 다짐이야. 위대한 사람이 되겠다는 뜻이야. 앓은 뒤 어쩌면 처음으로 꾸는 꿈이야.
이리도 원대하다니. 원대한 희망을 가질 정도로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니.
- 박종현, 「고양이 부루마불」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 시간, 자정이 막 지나가고 있는 늦은 밤에, 삼각김밥 따위로 식사를 갈음하는 사람이라면 쓸쓸할 수밖에 없다. 외로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오늘 너의 하루는 어땠느냐고, 역시 어제나 내일처럼 힘들고 고달팠느냐고 묻지 않는다. 그저 자리에 앉아 멍하니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면서,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 김과 밥과 짜고 달달한 무언가를 말없이 씹고 삼킨 뒤 집으로 돌아갈 뿐이다. 그런 적막함이며 외로움 같은 것들조차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인생의 일부라는 것처럼.
-이묵돌, 「블루 삼각김밥」

오늘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밥을 지어 먹어야지.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말을 해야지.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해야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니까, 꼭 말해야지.
쌀이 끓는 동안 우리.들의 사랑도 익어가겠지. 잘 익은 밥을 오래도록 나눠 먹어야지. 한 공기쯤은 따로 담아서 마음속 깊이 품고 다녀야지.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나눠 담던 풍경을 오래도록 기억해야지. 되도록이면 삼각김밥은 혼자 먹지 말아야지. 대충 허기를 달랜 기분이 들지 않게 해야지. 대충 사랑했던 우리들로 기록되지 말아야지.
- 제리, 「아는 얼굴」

“예전에 진짜 좋아했었어요.”
자주 듣는 얘기다. “옛날에 진짜 팬이었어요.” 참 반갑고 고마운 얘기지만 이 문장들은 현재형은 아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군 생활 속에, 초등학교 수학여행부터 대학교
오리엔테이션까지의 다양한 추억 속에, 수능 기간, 선거철 속에 남아 있다. 아주 가끔 옛 친구들과 노래방에 갈 때나 한두 번 꺼내어 볼까, 그들의 일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물며 나의 일상에도 그때의 나는 없다. 미안할 일도, 슬퍼할 일도 아니다. 그저 시간이 흐른 것뿐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핫펠트, 「언제였더라」

나는 인생을 바칠 각오도 없으면서 휘청휘청 추근댔다. 무슨 우리나라 최고의 가수나 세계 최고의 싱어송라이터 같은 게 될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이걸 멈출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거랑 이건 다른 거니까, 어설픈 노래는 계속됐다. 장비는 하나둘씩 쌓여갔다. 한숨과 자책과 불안이 ‘미-래-’라는 단어를 대체했다. 구멍 난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것처럼. 광막한 바다 위로 눈이 내리는 것처럼.
-김겨울, 「어는점」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는 밤에는 누운 채 가만히 구석에 놓인 책상을 보았다. 외국어로 된 책들 끝에, 캐리어에 딱 하나 골라 실어 온 시집이 잿빛으로 꽂혀 있었다. 그 아래엔 “그레이 구스” 보드카 병이 있었다. 뭔가 참을 수 없을 때면 시집을 꺼내 아무 데나 펴 한두 편 읽었다. 정제된 모국어가 익숙한 손길로 입가를 훑다 찬찬히 스며들었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을 때 보드카를 한 잔 마셨다. 그런다고 잠이 오는 것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잠시나마 속을 어루만져 주었다. 읽거나 마시지 않더라도 거기 있는 걸 보면 위안이 되었다. 토로할 능력도 없이 이해되지 않음을 원망하다 스스로 키운 상처들에 해줄 수 있는 것들이 있다면 그런 것들이었다.
-박종현, 「번역되지 않는, 번역할 필요 없는」

떠올려보면 그 시절의 나에겐 항상 가야 할 곳이 있었다. 학교에 가야 했고, 아르바이트하던 가게에 가야 했고, 틈틈이 시간을 내 야구 경기가 있는 낯선 동네에도 가야 했다. 출발할 역도 도착할 역도 모두 마련돼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시작하고 끝낼지 보다는 어떻게 중간 과정을 지나쳐 보낼지를 걱정하며 힘들어했다. 정말이지 이보다 더 답답하고 힘들 순 없으리라고, 이 고리타분한 과정만 지나 보내면 편하고 안락한 삶만이 펼쳐질 거라 생각했었다.
-이묵돌, 「서울 지하철 0호선」

때론, 한 사람의 마음이 전부를 기울게 한다. 너와 나를 사이에 놓고 우리가 터놓은 비밀들이 울창하게 삐죽거렸다. 사이가 무너지는 소리. 내가 기우는 소리. 나는 그 소리가 계
속 기울 걸 알면서도 ‘그래, 하나의 장면으로만 기억되고 싶지 않은 풍경도 있는 거니까’ 생각하며 내 마음을 못 본 척했다. 오히려 더 자주 만났고, 가늠할 수 없는 마음들을 마음껏 자라게 내버려뒀다.
-제리, 「시바 유끼」

주인에게 닿지 못할 편지지만, 조금은 후련하네요. 살면서 한 번도, 누군가에게 제대로 고백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항상 먼저 다가오는 사람을 만났고, 혼자 좋아하는 마음이 생길 때면 잘라내기 바빴던 것 같아요. 상처를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두려워서요. 그것도 사랑을 주고받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인데 말이에요.
-핫펠트, 「후시딘 님께」

언젠가 나는 또 실패할 것이다. 좌절하고 슬퍼할 것이다. 또 어쩔 수 없이 방황하다가, 멋진 게임 하나를 발견하게 되면… 그때 다시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른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오늘의 나는 해냈고, 미래의 나 역시 그러리라는 것. “You failed”라는 화면이 나왔을 때, 망설임 없이 “Try again”을 선택했었다는 사실까지.
-이묵돌, 「언젠가는 잊어버리겠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추억의 끝엔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도 함께 살고 있다. 그곳엔 자신이 타고 다니던 학원 차에 깔려 죽은 아까운 형이 있고, 나와 주먹다짐을 하다 아버지에게 들켜 다리를 접질린 같은 학교 형에 대한 미안함도 있다. 어린 여동생은 깍두기를 시켜놓고 같이 놀아주지 않으려 했던 미안함도 있고, “오빠 난 왜 깍두기야?”라고 묻는 동생에게 그게 제일 좋은 거라며 꿀밤을 때렸던 못난 마음도 함께 있다.
-제리, 「지금 사랑하지 않는 도시」

가끔은 다 버리고 싶다. 양양 바닷가 어딘가에 조그만 집 한 채를 짓고 매일 서핑하며 살고 싶다.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자존감의 롤러코스터에서 내리고 싶다. 인스타그램도 버리고, 사랑받는 나도, 사랑받지 못하는 나도 다 버리고 내가 나를 좀 사랑하고 싶다. 하지만 아직은 음악이 좋다. 노래하는 게 좋다. 노래하는 순간을 버릴 자신이 없다.
-핫펠트, 「노래하는 사람」

기억에 남는 문구

상처가 잘 아물었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지 않는 것처럼,
한번 생긴 상처는 잘 보이지 않을 뿐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