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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리투아니아 여인 -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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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여인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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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내가 울며 들어온 까닭을 묻는 아버지에게 모든 일을 사실대로 알리면 무슨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아 겁이 덜컥 나더군요. 그래서 오히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거짓말을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어요. 하지만 내 방에 들어가니 다시 밖에서 당한 일이 억울해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셨어요. 아버지는 울고 있는 저를 가만히 끌어안으며 말하더군요. 그래, 맞다. 얘야, 내가 너무 미련했다. 이제 돌아가자. 너희가 있었어야 할 곳으로, 라고.

그날도 나는 약간 들뜬 듯한 기분으로 이제는 나도 공동대표로 있는 우리 극단 사무실로 나갔다가 오랜만에 혜련을 만나게 되었다. 늘 그랬듯 우리는 어제 만났다 헤어진 사람들이 전날 하던 이야기를 다시 이어 가는 것처럼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으나 기억나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다. 그녀의 리투아니아 얘기였다.

따라서 나는 배우자가 아니라 우리 결혼 생활에서 아내 역을 맡을 배우와 결혼한 것이었고, 스스로는 원관념이 되는 삶을 함께할 남편이기보다는 우리 결혼을 성공적인 연극으로 이끄는 연출자이기를 바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런 우리 사이에는 애초부터 삶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배우와 연출가 또는 배우와 배우, 그리고 나중에는 연출가와 연출가의 만남이 되어 가장과 주부 또는 남편과 아내의 삶을 공연했을 뿐이었던 듯 싶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자주 함께 있게 되고, 생활의 여러 측면을 같은 시간대에 겪어 나가면서 나는 혜련에게서 전에는 보지 못한 여러 가지 습관이나 특성을 새롭게 알게 됐다. 그중에서도 전에는 아주 추상적이었던 것들이 구체적으로 잡혀 오면서, 어떤 때는 전혀 알지 못한 것을 새로 발견했을 때와 같은 놀라움이나 감동에 빠지기도 했다. 선입견이나 억지스러운 간주에 가까운 그녀의 국제성 또는 문화적 다양성이 그랬다.

거기다가 그 해외 공연에서 받은 호평에 힘입어 혜련이 이끄는 시립 교향악단이 보다 유서 깊은 음악 무대로부터 초청받게 되면서 매스컴의 갈채와 찬사는 더욱 요란해졌다. 그리고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그 음악 홀에서의 협연마저 현지의 호평 속에 막을 내리자 혜련은 그 시대 우리 대중문화의 아이콘 중 하나로까지 끌어올려졌다.

기억에 남는 문구

집착은 그리움의 다른 말이며,
사라진 과거, 사라진 영광에 대한 집착은
시간의 파괴력에 대한 부질없는 저항일 뿐이다.
하지만 그게 부질없기에
우리에게 더욱 진한 연민과 감동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