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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계속 가봅시다 남는 게 체력인데 - 정김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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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가봅시다 남는 게 체력인데

정김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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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2019년 6월에도 어김없이 캘리포니아에서 모였다. 행사 마지막 날, 전 세계 커뮤니케이션을 총괄하는 부사장과 각국의 여러 리더 들이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나는 늘 갖고 있던 생각을 바탕으로 수백 명 앞에 손을 들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본사에 인터내셔널 리에종(liasion), 즉 중개자 역할을 담당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미국 내에 있는 전 세계 매체 특파원들을 지원하고 각국에 있는 커뮤니케이션팀들과 미국 본사에 있는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들을 이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 많은 기회를 만들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사실 아이디어를 제안할 때 만 해도 내가 그 자리에 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막상 채용 확정이 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몰려 왔다. 한국에 가족을 두고 나만 훌쩍 떠나도 되는 걸까? 완전히 새로운 곳에 가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게 아닐까? 게다가 ‘인터내셔널 커뮤니케이션’은 영어 원어민도 힘들 다는 직무인 데다, 신생 팀이니 1인 팀으로 시작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나는 과연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것일 까?

구글에는 화려한 이력과 뛰어난 실력으로 무장한 인재들이 넘쳐나지만, 내가 체력 하나는 자신 있다. 평범한 문과생 출신 아시아인이 50대가 되어서까지 현역으로 일할 수 있는 경쟁력은 이 체력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략) 체력이야말로 우리가 인생을 끈질기게 이끌어나가게 만드는 숨은 저력이다. 나는 눈 뜨자마자 아침 러닝 한 시간에, 저녁 걷기 한 시간, 주말마다 백패킹을 떠나거나 검도와 수영을 하고 있는데, 20~30대 때보다 지금 더 많은 시간을 건강과 운동에 투자하고 있는 셈이다. 후배들에게도 평소에 잔소리는 거의 안 하지만, 대신 이런 말을 정말 자주 한다. “운동하는 시간을 아깝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영어 공부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체력에 시간을 투자하세요. 체력도 실력입니다.”

구글에서 한 해 한 해를 정신없이 보내는 동안 나는 나이 랭킹의 상위권도 갱신하고 있었다. 마침내 최고령자 그룹 혹은 최장기 근속자가 되어버렸을 때, 어느 순간 사무실에 선배보다 후배가 더 많아졌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나이까지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도 되는 걸까?’ 그도 그럴 것이, 구글코리아에서 근무하는 12년 동안 사장이 세 번 바뀌었고 내 직속 상사인 아시아태평양(아태)지역 커뮤니케이션 총괄도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로 네 번이나 바뀌었다. 모두 좋은 사람들이고 자타가 인정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분들이지만,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볼 때면 ‘나는 왜 안 되나’ 하는 생각이 왜 안 들었겠는가. 미국에 와서는 상황이 더하다. 내 동료 그룹에 있는 다른 디렉터나 디렉터 위의 VP(부사장, Vice President)들도 대부분 (사실 전부) 나보다 나이가 적으니까 말이다.

몇 날 며칠을 밤잠을 설치며 고민하던 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일명 ‘본 어게인(born again)’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나를 다 버리자는 게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모습으로 ‘확장’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의 첫 번째 단계는 바로 내가 되고 싶은 캐릭터인 미래의 나를 구체적으로 그려보는 것이었다. 소심하고 소극적이었던 내가 되고 싶은 나는 어떤 모습일까? 이 질문에 차근차근 답하며 본질적인 변화의 방향을 설정해보기 시작했다.
나의 답은 이랬다. ‘나와는 정반대의 사람이 되고 싶다.’

검도 실력은 검도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을 전혀 따라오지 못한다. 검도장에서의 자칭 타칭 별명은 ‘전광석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그런 전광석화 같은 공격력을 칭찬하는 별명이라면 참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빠르게 경기에 져서 만들어진 별명이다. (중략) 내 경기는 시작 30초 만에 끝나버린다. 2점 딱 맞고 전광석화처럼 지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오후가 되어야 끝나는 대회에서 내 시합 시간은 고작 30초. 그래서 내 목표는 대회 우승이 아니라, “무조건 3분을 버틴다!”가 되었다.

나는 정말 배움의 속도가 느린 사람이지만 그건 느린 거지 늦은 건 아니었던 셈이다. 어떤 일에 너무 늦은 건 없다. 뻔한 말이지만 그만큼 맞는 말이다. 오늘 하면 내일 달라질 수 있다. 오늘 통하지 않는 말도 내일은 통할 수 있다. 하루가 열흘이 되고 열흘이 1년이 되고…… 그렇게 50대에도 매일매일 발전하는 영어 실력을 실감할 수 있게 된다. 일단 계속해보자. 꾸준히를 이길 방도는 없다. 특히 언어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구글코리아에 입사한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이날은 구글코리아가 속한 아태지역 팀의 콘퍼런스가 있었다. 7, 8개 도시에 분포한 약 50여 명의 커뮤니케이션 부서원들이 동시 접속하여 화상통화로 진행되는 회의이고, 당연히 영어로 진행된다.
특히 이날은 내가 7분 정도의 발표를 맡은 날이었다. (중략) 그렇게 7분 발표가 끝났다. 아, 해냈다! 후련하고 뿌듯한 마음에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제 발표는 여기까지입니다. 질문 있으세요?” 나는 모니터를 그제야 올려다보았다. 어라? 화면에 있는 모든 사람이 토론을 하는 것 같았다. 내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모두가 자기 할 말을 하고 있다. 대화 주제 역시 내 발표 주제와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다. 이게 뭐지? 왜 내 발표를 아무도 안 듣지? 당황해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깨달았다. 여태 뮤트(음소거) 버튼이 버젓이 눌려 있었던 것이다. 맙소사, 발표 7분 내내 음소거를 해놓고 혼자 말을 한 것인가?

“구글 15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언제인가요?” “구글 15년 동안 가장 아찔했을 때가 언제였나요?” 이 두 질문에 대한 내 답은 같다. “2016년 서울, 알파고 대국이 있었을 때입니다.” (중략) 전 세계가 주목하는 글로벌 행사에서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담당하는 총괄로서 내게 주어진 임무가 매우 막중했다. 내가 하는 일 하나하나가 전 세계 언론을 통해 전해진다고 생각하니 버거운 한편 묘한 설렘과 긴장감이 감돌았다. 바둑 하면 떠오르는 건 까만 돌과 하얀 돌밖에 없던 내가 세기의 대결 한가운데 서게 되다니!

“석사 다섯 개 모으면 박사 주냐?” 다섯 번째 학위를 준비하던 ‘학위 콜렉터’인 내게 친구들이 놀리듯 한 얘기다. 당연히 안 준다. 나는 그동안 근무한 모든 회사에서 심심찮게 부서 이동을 했다. 그리고 새 직무를 맡아 새로운 인풋이 필요하다 싶으면 제일 먼저 대학원을 검색해보고 나에게 필요한 수업 과정들을 찾아봤다. 공부는 그야말로 내가 커리어를 겁 없이 확장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였다. “내가 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를 의심하는 대신, “공부하면 되지, 뭐”라고 할 수 있는 비빌 언덕.

김경숙으로 29년을 살고 서른 살이 되던 해, 난 ‘정김경숙’이란 이름으로 명함을 새로 만들었다. 아버지의 김씨 성을 유지한 채 이름 부분에 엄마의 정씨 성을 넣어서 ‘김정경숙’으로 하면 호적상 이름을 바꾸기는 수월하겠지만, 내가 원한 것은 엄마 성을 앞에 내세우는 것이었다. 당시 모토로라코리아에 근무하던 나는 명함을 포함해서 대외적으로도 정김경숙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정김경숙이라는 새 이름이 새겨진 빳빳한 명함을 받아든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 정말 잘한 결정이었어.’ 다른 누구도 아닌 엄마가 지금의 나를 만드셨다는 이야기를 엄마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엄마와 딸이라는 모녀 관계를 넘어 여성과 여성의 연대로 다시 태어난 날이었다.

성장은 일만 잘한다고 해서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우리가 일을 하는 건 이미 채운 걸 쓰는 일이지, 채우는 일이 아니다. 비우기만 하고 어떻게든 스스로를 채우고 성장하는 즐거움을 찾지 않으면 스스로 발전을 포기하게 되어버린다. 내 일의 미래를 놓치지 않으려면, 매일매일 꾸준히 채우는 자기만의 ‘채우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얼마 전 구글에서는 200여 명의 여성 직원을 대상으로 ‘임포스터 신드롬 극복기’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임포스터(impostor, 가면) 신드롬’이란 “나는 이럴 자격이 없어”, “이곳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라고 되뇌면서 남들보다 똑똑하지 않고 실력도 없는 자신이 남들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성공에 대한 욕심이나 기쁨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현상을 말한다. 자신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데도 주변 동료들이 너무 뛰어나 보여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과소평가하며 자신감 없는 태도를 갖게 된다. 놀랍게도 이는 구글러들이 많이 겪는 심리적 현상이기도 하다. 구글 리더들과의 대화에서 항상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질문이 “임포스터 신드롬이 있었나요? 있었다면 어떻게 극복하셨어요?”일 정도다.

기억에 남는 문구

시간은 당신을 배반하지 않는다.
그 시간을 믿고 계속하면
가장 좋아하는 나가 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