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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 고든 마리노(Gordon Mar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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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고르, 나로 존재하는 용기

고든 마리노(Gordon Mar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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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다른 어떤 계파의 철학자들보다, 실존주의자들은 우리 내면에서 제기되는 문제들, 예컨대 불안과 우울 및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을 정확히 파악했다. 오늘날 이런 내면의 동요들은 의학적인 용어로 분류된다. 그러나 실존주의자들은 이런 괴로운 감정들을 다른 식으로 해석하는 방법,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그들만의 독특한 방법들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이 책에서 나는 그 방법들을 되살려내려 한다.

진리를 향한 갈망은 지적인 호기심을 넘어서는 것이 되어야 마땅하다. 또 우리를 더욱 성장시키는 진리, 요컨대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더라도 더 나은 인간으로 키워주는 진리를 향한 갈망이어야 한다.

우리가 실존주의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적 메시지 중 하나는, 고통이 인간을 파멸시키거나 바위처럼 몰인정한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영적인 성장을 촉진하는 자극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천길만길의 아득한 낭떠러지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머리가 아찔하고 뱃속이 뒤틀리며 불안감이 몰려온다. 그 이유는 우리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언제라도 뛰어내릴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울은 반드시 절망을 뜻하는 게 아니고, 절망 또한 꼭 우울을 뜻하지는 않는다.

절망의 주된 징후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자아를 제거하려는 욕망이다. 대체로 이 욕망은 혼신을 다해 다른 사람이 되려는 바람의 형태를 띤다.

진지함과 성실함이란 표현은 요즘 독자들에게 찾아보기는커녕 그 가치를 인정받기도 힘들다. 물론 요즘 사람도 좋은 성격을 지닐 수 있지만, 성실함은 그다지 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키르케고르의 글에서는 성실함이 삶의 보편적인 목표로 인정받는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부각된다. 그렇다, 행복하려면 어떤 미덕이 필요할 수 있지만 행운이란 요소도 무척 중요하다. 요컨대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곳과 적절한 가족의 품에서 적절한 재능을 갖고 태어나야 한다. 이런 모든 조건이 갖추어지면, 의미 있고 재밌는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배가된다. 성실함은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행복과는 같지 않아서, 행운, 즉 삶의 로또는 성실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우리가 그 감정을 이해하는 방법은 별개의 것이다.

진정성이 버킷리스트나 자아실현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당신은 모든 잠재력을 발현해서 피카소 같은 화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잠재력을 발현한다고 당신이 진실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때 진실한 존재는 당신의 진정한 자아, 즉 신이 당신에게 의도한 자아를 뜻한다.

키르케고르는 과학이 활짝 개화되던 시대에 살았지만, 신앙을 설명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의 삶을 보이지 않는 신에게 맡겨야 하는 객관적인 이유도 제시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예수와 영생에 대해 스토아 철학자들에게 설교하자, 이성의 화신이던 스토아 철학자들은 바울을 비웃으며 술에 취한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키르케고르의 관점에서 보면, 스토아 철학자들은 바울을 비웃을 만했다. 기독교 신앙은 이성적 이해에 대한 모욕이었으니까.

어떤 사람이 무엇이 옳은지를 아는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앎의 가치는 떨어진다. 그 후에는 ‘의지는 이렇게 인식된 것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라는 문제가 뒤따른다. 의지는 변증법적이고, 그 밑에는 인간의 저급한 본성이 깔려 있다. 만약 의지가 인식된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반드시 의지가 제멋대로 앞질러 가서 앎이 인식한 것과 반대되는 것을 행하는 결과가 뒤따르지는 않는다(아마도 이처럼 뚜렷이 대조되는 결과는 매우 드물 것이다). 오히려 의지는 약간의 시간이 흐르도록 허용한다. 달리 말하면, “내일 검토해보겠다”라는 중간 상태를 허용한다. 이 모든 것이 진행되는 동안, 앎은 점점 더 흐릿해지고, 저급한 본성이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좋은 것은 알려지는 즉시 곧바로 행해져야 하지만 …… 저급한 본성의 힘은 모든 것을 질질 끄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전개에 대한 의지의 반박은 점진적으로 약화되어 거의 공모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가 된다. 앎이 충분히 흐릿해지면, 앎과 의지는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마침내 앎이 의지의 편에 서서, 의지가 원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인정하면, 앎과 의지는 완벽하게 일치하게 된다.

도덕적으로 말하면, 유혹은 저항이 가장 적은 길을 택하는 동시에 그 길이 옳은 길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자신의 주체감을 약화시키면, 우리의 도덕적 이해력도 조금씩 떨어진다. 키르케고르였다면 ‘변증법적’이라고 칭했을 이런 역학 관계 때문에, 우리 기성세대는 젊은이들을 무시하듯이 내려다보며 ‘너희가 지금은 이상적인 생각으로 가득하겠지만 머잖아 알게 될 거다’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알게 된다는 것일까? 이상적 생각들을 어떻게 끊어낸다는 것일까?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당신이 발설하면 냉대를 받거나 승진에서 탈락하게 될지도 모를 진실의 폭로를 늦춤으로써 당신의 도덕적 이해를 은근히 덮어버리게 된다는 말일까? 출세 제일주의, 성공으로 보장되는 물리적 안락함과 소속감 등은 희생이 요구될 때 모르는 척해야 한다는 가장 강력한 동기 중 하나이다.

신앙을 다룬 장에서 언급했듯이, 키르케고르는 기도가 신을 바꾸지는 않지만, 기도하는 사람을 바꾸고 발전시킨다고 했다. 후회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내가 과거의 행동을 되돌리고 지울 수는 없지만, 회한으로 현재의 나를 바꿀 수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그대의 후회를 최대한 활용하라. 그대의 슬픔을 억누르지 말고, 소중히 돌보고 보살피라. 슬픔이 독자적으로 필요불가결한 관심사가 될 때까지. 깊이 후회한다는 것은 새롭게 사는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다른 사람에게도 사랑하는 능력이 있다고 전제하는 이상한 의무도 사랑의 책무 중 하나이다. 달리 말하면, 사르트르와 카뮈와 니체와 달리 키르케고르는 누구나 사랑하는 기본적인 능력을 지닌다고 전제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믿었다. 우리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만이 아니라, 길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우리를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기억에 남는 문구

어떤 사람이
무엇이 옳은지를 아는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앎의 가치를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