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가끔 대외적으로 나를 소개할 일이 생기면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을 하다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었고 그림을 빼놓고는 말할 거리가 없는 존재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고 낮잠을 시원하게 자고 일어나서 그림을 한 장도 그리지 않은 날에 생각한 건데, 이제 내 소개를 한다면 이렇게 할 것 같다.
“나는 내 맘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회사를 그만두면 매달 생활비를 책임지던 울타리가 사라진다. 이십 대의 뒷자리를 홀로 걸어야 한다. 그래도 상사가 던져주는 일은 하기 싫었고 무엇보다 내 꿈을 부풀게 하는 오후의 햇볕을 블라인드 사이로만 봐야 한다는 것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모두에게 내리쬐지만 나에게는 너무 멀리 있어 온전히 가질 수 없는 햇빛을 너무나 염원했다. 결국 나는 터널 밖으로 스스로를 집어던졌다. 뭘 해도 골치 아픈 거라면 그림을 그리면서 골치 아픈 쪽이 조금 더 나을 거라 생각했다.
찾지 못했다. 이유 없음. 의미 없음. 절실함 없음.
골똘히 머리를 굴려봤자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은 이것 말고도 천지다. 베를린에서 전시해달라며 부르는 이도, 거기에 가면 좋을 똑 부러지는 이유도 없다면 갈 수밖에 없지. ‘특별한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 하고 싶다면 그게 가장 ‘끝내주는 이유’다.
나로 돌아가려는 탄성의 법칙이라도 있는 걸까?
그는 헤어지자마자 끊었던 담배를 다시 폈고
나는 몇 년간 기른 머리를 잘랐다.
기분 탓에 그런 게 아니라 서로를 위해
그간 가장 많이 참았던 걸 다시 시작한 것이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보았던 롤링스톤즈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일흔 넘어 머리카락이 하얀 할아버지들이 여전히 머리에 두건을 쓰고 가죽바지를 입고 무대를 휘젓는데 수십만 명이 열광했다. 무대 위 그들은 여전히 섹시하고 무대 뒤에서는 장난스러웠다. 영화를 보면서 다짐했다. 어떤 풍파가 몰아치고 주변에서 나이에 맞는 태도를 요구하더라도 섹시함과 장난스러움만큼은 잃지 말아야겠다고. 그리고 지금 내가 가진 젊음처럼 세월을 통해 하나씩 찾아오는 수식어들은 그때가 아니면 두 번 다시 써보지 못할 것들이기에 아낌없이 사치할 것이라고.
기억에 남는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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