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대항해시대 일본의 상황은 아메리카·아프리카와 중국 대륙의 중간 정도였습니다. 일본은 아메리카·아프리카처럼 분열 상태였지만, 유럽 세력이 본격적으로 일본에 접근하기 시작하는 16세기 중반에 이르면 분열에서 통합으로 서서히 방향이 바뀌어갑니다. 그 계기는 유럽 세력의 일본 접근을 상징하는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1549년 일본에 상륙한 사건입니다.
1540~1550년대 일본은 전국시대에서 통일로 향하던 시기여서 분열보다는 통합으로의 열망이 컸고, 센고쿠 다이묘들은 수많은 전쟁 경험을 통해 유럽의 신무기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럽 세력을 몰아내는 것 이상으로, 자신들이 일본을 지배하는 데 불만을 품은 백성과 불교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일본을 포함한 동중국해 연안 지역에 나타난 유럽 세력의 핵심은 군사 집단이 아니라 선교사였습니다. 한마디로 일본은 실력과 운에 의해 간신히 유럽의 군사적 진출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실력보다 행운에 의해서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외부로부터의 충격과 새로운 기술의 탄생은 이렇게 인간 사회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17세기 일본의 경우, 전 세계의 기축통화가 된 일본 은을 대량으로 생상하게 된 것은 조선의 발달된 은 제련 기술이 일본으로 전래된 덕분이고, 상업출판이 융성하게 된 것 역시 조선과 유럽의 인쇄술이 일본에 전래된 덕분이었습니다. 즉 기술이 들어오면서 사회 시스템이 바뀌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정신과 물질적 조건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일본은 한국과 매우 다른 역사적 경험을 지녔습니다. 그 경험의 차이가 가장 크게 두드러지는 부분이 16~17세기 남중국해 연안에서 전개된 일본인의 활동, 그로부터 촉발된 유럽과의 접촉입니다. 이런 차이를 못 본 척하고 한자 문화권이니, 유교 문화권이니, 왕인 박사니 하며 한국과 비슷한 것만 찾아서는 결코 일본의 참모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즉, 기계를 만들기 위한 핵심적인 부분들은 책에 적혀 있지 않을뿐더러, 글자로만 기록하거나 전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포르투갈인 왜구가 조총을 직접 가지고 와서 일본인들에게 사용법을 가르쳐준 것은 그런 의미에서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징비록》에도 나와 있듯이, 임진왜란 직전에 쓰시마 측에서 조총을 선물로 주었으나 조선이 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류성룡의 언급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다행히 최근에는 일본에서도 유럽 가톨릭의 자료를 통해 16~17세기 일본을 연구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치 고대 중국을 연구할 때 땅속에서 갑골문자나 백서, 죽간, 목간 같은 출토 문헌이 나오기 전에 제작된 문헌과, 막대한 양의 출토 자료를 활용하는 20세기 후반 이후의 연구 내용이 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출토 문헌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지 않은 《주역》 해설서를 읽는 것은 헛된 일이 될지 모릅니다. 백 년 뒤의 세계인들은 지금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고대 중국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말라카가 유럽의 식민지가 되고 일본이 그렇게 되지 않은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말라카가 일본보다 훨씬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에 위치해 있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포르투갈이 동남아시아의 향료 무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핵심 교역지인 말라카를 장악해야 했습니다. 이에 반해 일본은 무역의 대상으로서는 매력적이었지만 다른 지역고 교역하기 위한 무역 거점은 아니었습니다. 태평양을 이용해 무역 루트를 만든 스페인으로서도 어딘가 거점을 찾는다면, 자체적으로 무장되어 있어서 정복하는 데 애로 사항이 많은 일본보다는 저항이 약한 필리핀을 차지하는 것이 훨씬 손쉬웠을 것입니다. 말라카와 일본은 모두 자체적으로 잘 무장되어 있었지만, 두 나라가 처한 지정학적 위치가 달랐기 때문에 말라카는 식민지가 되고 일본은 살아남은 것입니다.
저는 이 사건들이 단순한 이율배반적인 차원을 넘어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지배집단이 5백 년간 이어진 왕족과 양반 중심의 국가 시스템을 지키려 했던 데 반해, 동학교도로 대표되는 피지배집단은 말하자면 평등주의적인 새로운 국가를 지향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발생한 이들 사건은 한반도 내부의 노선 투쟁이자 계급 갈등이었던 것입니다. (...) 만약 갑오농민전쟁 때 외국군이 한반도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한반도에서도 16세기 일본의 잇코잇키 같은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이 발현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이런 문제를 민족주의라는 관점에서, '우리는 단군 할아버지에게서 비롯된 하나의 민족'이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덮고 넘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19~20세기 한국사에서 보이는 이런 종류의 갈등과 대립을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낼 때가 왔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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