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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지구에서 한아뿐 - 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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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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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이건 플라스틱이야, 페트야?”
웅크리고 있던 경민이 혼잣말을 하며 망설였다. 그러더니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딱 시선의 사각지대에 있던 한아를 발견 못한 채, 입을 벌렸다.
경민의 입에서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강렬한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경민의 손에 들린 일회용 음료수병을 핥았다. 순간이었지만 레이저처럼 강렬했다.
“음, 페트구나.”
놀란 한아가 과일 봉지를 떨어뜨렸다. 사과 한 알이 골목 쪽으로 굴러갔다. 빈혈인가? 빈혈이라서 눈앞이 번쩍인 걸까? 어지러워. 지금 대체 뭘 본 거지?
“어, 한아야, 언제 왔어!”
얼굴 가득 웃으며 경민이 한아를 반겼다.

“그 생각, 나도 했지. 그래서 억지로 수십억 다른 지구인들을 관찰해봤는데도 같은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어. 미적인 기준이 아주 다르기 때문에 솔직히 인간은 아무리 봐도 아름답게 안 느껴져. 근데 너만…… 너만 예뻤어.”
우주인 눈에 예쁘면, 역시 지구인 눈에는 안 예쁜 걸까. 한아는 아연했다.
“가까이서 보고 싶었어. 나는 탄소 대사를 하지 않는데도 네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싶었어. 촉각이 거의 퇴화했는데도 얼굴과 목을 만져보고 싶었어. 들을 수 있는 음역이 아예 다른데도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너를 위한, 너에게만 맞춘 감각 변환기를 마련하는 데 긴 시간이 들었어.”

그러니 어쩌면, 한아는 이제야 깨닫는 것이었는데, 한아만이 경민을 여기 붙잡아두고 있던 유일한 닻이었는지 몰랐다. 닻이라고 하기에도 너무 유약하고 가벼운 닻. 가진 게 없어 줄 것도 없었던 경민은 언제나 어디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종국에는 지구를 떠나버린 거다. 한아의 사랑, 한아에 대한 사랑만으로는, 그 모든 관계와 한 사람을 세계에 얽어매는 다정한 사슬들을 대신할 수 없었다. 역부족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닻이 없는 경민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나아갈 수 있을지.
쉬운 과정은 아니었으나 그런 결론에 이르자 한아는 떠나버린 예전의 경민에 대한 원망을 어느 정도 버릴 수 있었다. 나때문이 아니었어. 날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던 거야. 다만
오로지 그 사랑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었던 거지. 양서류와 조류만큼이나 애초에 종이 다른, 다양한 관계들을 다 대신할 수는 없었어. 역부족도 그런 역부족이 없었던 거야.

경민이 억지로 웃었다. 조심스럽게 한아의 얼굴 윤곽을 따라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그 손바닥이 와 닿지 않아서, 한아가 아닌 한아 주변의 공기를 쓰다듬는 것 같아서, 한아는 마음이 더 아파졌다. 집을 나서는 경민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할 것 같았다.
“널.”
그러나 한아는 마땅한 동사나 형용사를 찾지 못했다.
“……너야.”
언제나 너야. 널 만나기 전에도 너였어. 이 마음이 그냥 전이된 거라고 생각해왔었는데, 틀렸어. 이건 아주 온전하고 새롭고 다른 거야. 그러니까 너야, 앞으로도 영원히 너일 거야, 한아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채 말하지 못했고 물론 경민은 그럼에도 모두 알아들었다.

기억에 남는 문구

어떤 특별한 사람은
행성 하나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때가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