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농성 개시 전날 정과 막내 차가 함께 굴뚝으로 올라와 비닐 가리개와 천막 설치를 도와주었다. 그들은 맨 마지막에 난간을 가린 비닐 바깥쪽에 플래카드를 두르고 단단히 붙들어맸다. ‘!라하장보동노용고 지저각매할분’이라는 글씨는 농성의 이유를 밝히는 제목답게 크게, ‘!직복원전 계승조노’라는 글씨는 소제목처럼 그 아래 작게 썼다. 이진오는 그것을 올려다볼 사람들의 세상 반대쪽에서 거꾸로 보이는 글씨를 읽을 수밖에 없다.
“노동투쟁은 원래가 이씨네 피에 들어 있다. 너 혼자 호강하며 밥 먹자는 게 아니구, 노동자 모두 사람답게 살아보자 그거 아니겠냐? (…) 한두달 새 내려올 생각 아예 마라. 쩌어 예전부터 지금까정 죽은 사람이 숱하게 쌨다.”
그녀가 하는 말은 큰할아버지 이백만과 할아버지 이일철과 아버지 이지산이 늘 입에 달고 쓰던 말이었다. 그 말은 이진오의 어머니 윤복례도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동의했고 자신의 생각이기도 한 말이었다.
이 모든 노력들에 의미가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증조할아버지 이백만에서 할아버지 이일철과 아버지 이지산을 통해 그에게 전해진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삶은 지루하고 힘들지만 그래도 지속된다는 믿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낸다.
“너 굴뚝 위에 혼자 있는 거 같지?”
“할머니하구 이렇게 같이 있잖아요.”
그녀는 손자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저어기 하늘에 별들 좀 보아. 수백 수천만의 사람이 다들 살다가 떠났지만 너 하는 짓을 지켜보구 있느니.”
진오는 다시 어린것이 되어 할머니의 손을 잡고 영등포시장 거리로 나아갔다. 언제나 꿈속처럼 보이던 버드나무집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모녀는 저녁조차 먹지 못하고 고구마까지 빼앗겨 맥이 풀린 채 터덜터덜 집골목으로 들어섰다. 엄마가 문 앞에서 주저앉더니 꺼이꺼이 울면서 부르짖었다.
“같이 좀 살자, 못된 것들아. 같이 좀 살아.”
이진오는 그녀가 말하려던 충분한 한마디가 바로 이 말이라는 걸 알아들었다.
“노동자가 높은 데로 올라와 사람들에게 자기 처지와 입장을 알아달라고 농성하게 된 것만 해두 엄청난 사회적 변화라구. 우리 할머니는 늘 그렇게 말했어. 어쨌든 세상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져간다고.”
이진오는 지금 굴뚝 위에서 자신이 겪고 있는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 혹한의 겨울밤에도 저 굴뚝 아래 아파트와 건물 빌딩들의 빛나는 창문들과 강변도로 위를 끊임없이 흘러가는 매끈하고 날렵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물결을 볼 때마다 세상은 언제나 그냥 무심하다는 걸 실감한다. 그는 버려지거나 잊힌 것도 아니고 그냥 가로수보다도 못한 관심 밖의 미물에 지나지 않았다.
사방에서 여러가지 소식이 몰려왔다. 남쪽 도시 어느 곳에서는 택시기사가 크레인에 올라가서 일년 가까이 농성 중이었고 기차의 여성 승무원들은 십여년 넘게 복직투쟁을 계속했다. 또 교사들은 법외 노조를 제도권 안으로 회복시켜달라고 몇년째 거리에 나와 있었다. 어디서는 청소원들이, 또 어디서는 임시직 노동자가 죽고 다치고 쫓겨났다. 이들에게 시간은 정지되어 있었다. 진오의 동료 열한명에게도 이 싸움은 삼년이 넘게 지속되었고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었다.
기억에 남는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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