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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 - 이즈미야 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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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따위를 삶의 보람으로 삼지 마라

이즈미야 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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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정신과 의사인 내가 예전에 주로 다룬 문제는 애정결핍, 열등감, 인간에 대한 불신처럼 뜨거운 감정에 따라 일어나는 고민, 즉 ‘온도가 높은’ 고민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요새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고민, 즉 존재 가치나 살아가는 의미에 관한 상담이 많아졌다. 혼자 남몰래 고뇌하는 ‘온도가 낮은’ 고민이 주가 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은 주로 온도가 높은 고민이나 정신질환을 다루는 데 역점을 두었던 탓인지 온도가 낮은 문제에 대해서는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최근 급격히 증가한 소위 ‘신형 우울증’을 둘러싸고 불거진 일부 정신과 의사들의 비판적 발언은 이러한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기존의 접근방식으로 대처할 수 없다는 조바심 때문인지 치료자로서의 무력감을 숨긴 채 재빨리 태도를 바꿔 ‘이러한 증상은 애초에 환자의 의지박약이 원인으로 정신의학이 최선을 다해 다룰 가치가 없다’라고 천연덕스럽게 문제의 본질을 바꿔치기 하고 있다. 이는 심리학에서 잘 알려진 ‘신 포도의 기제’라는 방어기제에 의한 것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대상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왜곡된 합리화다.

_ ‘들어가는 말’ 중에서

생활에 공백이 생기는 게 싫어서 일정을 빽빽하게 짜 넣는다. 출퇴근 때에도 시간을 헛되게 보내고 싶지 않아 경제신문을 읽으며 정세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거나 어학 파일을 들으며 외국어 실력을 높이는 데 힘쓴다. 혼자라는 생각에 빠지지 않으려고 모바일 메신저나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로 항상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고자 한다. 집에 있는 동안에는 보지 않더라도 항상 텔레비전을 켜놓는다. 시간을 죽이려고 끊임없이 게임이나 인터넷 서핑을 한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우리 내면에 자리한 공허와 마주하지 않으려고 무의식중에 하는 수동적인 행동이다. 현대인은 공백, 무익, 무음에서 공허를 느끼기 쉬워서 이를 피하기 위해 다양한 장치를 만들고 거기에 모여든다.
많은 사람을 두루 사귀며 교류한다거나 하루하루 뜻깊게 보내거나 자신이 발전할 수 있도록 시간을 소중하게 쓰는 등 학교에서라면 크게 장려할 법한 이러한 행동이 사실은 공허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수동의 한 형태일 뿐이다.

_ ‘공허함을 탕진으로 채우는 사람들’ 중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입구에 내걸린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라는 표어가 찍힌 사진이다. 물론 이 표어가 새빨간 거짓말이며 이곳에 수용되어 있던 유대인 포로들은 벌레와 다를 바 없이 착취당해 많은 사람이 병들어 죽거나 가스실로 보내지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는 상당히 특수한 상황 아래서 벌어진 대학살이었지만, 노동교가 지배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표어는 결코 연관 없는 역사상의 유물이 아니라 통렬한 풍자로 다가온다. 우리도 어느새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거짓된 표어에 휘둘려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사회에서는 노동하는 권리나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투쟁을 직접 보는 일은 있어도 관조생활을 위한 투쟁은 볼 수가 없다. 라파르그가 게으를 권리로 표현한 관조생활의 특권을 누리고자 하는 다이스케 같은 고등유민만이 혼자 묵묵히 싸우고 있다.

_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한다는 거짓말’ 중에서

루터는 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소명’이라는 개념을 ‘일에 종사하는 것은 모두 소명이다’라고까지 확대해석하고 이것을 ‘천직’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이미 신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실현이라는 명목으로 ‘본연의 나’에 어울리는 직업을 찾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스벤젠은 이러한 현대인의 상황을 비꼬아 ‘낭만주의적 변형’이라고 지적한다.
최근 철학자들의 논조와 마찬가지로 스벤젠의 의견에도 ‘본연의 나’ 찾기, 즉 진정한 자신을 찾는 일에 대한 회의적인 뉘앙스가 들어 있다. 하지만 현대의 진정한 자신 찾기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 찾기로 바뀌었다는 그의 지적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_ ‘일은 자아 찾기 과정이 아니다’ 중에서

개미가 훌륭하다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는 우리에게는 이 이야기가 실로 딱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원래의 <매미와 개미>에 나오는 개미도 탐욕스럽고 인색한 존재였기 때문에 이솝우화 안에서는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근면과 인내를 미덕으로 삼으며 미래에 대비해 저축하는 자세를 바람직하게 여기는 경향이 무척 강해서 ‘개미와 베짱이’의 개미처럼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실제로는 개미처럼 ‘오늘 즐기는 삶’을 희생하고 부지런히 돈을 모았지만 특별히 어디다 딱히 사용할 줄을 모르는 탓에 결국 다 쓰지 못한 유산이 남겨진 가족들 사이에서 상속분쟁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이는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무척 흔한 전말이다.
이러한 개미신앙은 금욕적으로 노동하며 미래에 대비하는 삶을 과도하게 찬양하고, 그 반작용으로서 ‘현재를 위해 살아가는’ 또는 ‘삶을 즐기는’ 일을 옳지 못하다고 인식하는 왜곡된 가치관을 만들어냈다. 괴로운 일을 참고 견디는 것이야말로 정당한 일이고 즐기거나 마음 편한 일은 타락으로 여겨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한 심리 상태로 답답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 오늘날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_ ‘개미보다는 베짱이의 삶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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