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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아디야샨티의 가장 중요한 것 - 아디야샨티(Adyashan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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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야샨티의 가장 중요한 것

아디야샨티(Adyashan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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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 동안 내가 뛰어나게 잘했던 것들은 모두 그것이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내가 거기 있는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이 나를 분발하게 하는지,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매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던 것이다. 영성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영적인 삶이 어떠해야 한다는 편견들, 즉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 규정하는 것을 끊어내고, 진정으로 내게 속한 것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깨달음을 장사꾼처럼 파는 말들을 피했고, 영성에 관련되었다고 여기는 많은 것들을 성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진리를, 존재의 가장 깊고 가장 근본적인 진리를 알고 싶었고 삶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싶었다. “진리라는 것이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나의 질문이었고, 내 머리를 떠나지 않고 나를 분발하게 하는 힘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진리에 대한 욕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늘 나와 함께 있었다.
여러분은 어떤가?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가? 머릿속에 맨 처음 떠오른 생각이 그것이라고 여기지 않는 게 좋다. 정말 진지하게 탐색하고 심각하게 숙고해야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고, 이를 적용하면 인생의 어떤 분야에서든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잘 살펴보고, 정신 수양을 하고, 남들에게서 배운 쉽고 빠른 해답에 안주하지 않을 때, 아무도 줄 수 없고 오직 자신에게만 속한 것을 찾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따금 내게 “당신은 영적 교사니까 언제나 봉사해야지요.”라고 말한다. 내가 유일하게 봉사하는 때가, 내가 다르마에 봉사하는 유일한 시간이 한 무리의 사람들 앞에서 뭔가를 하고 있을 때뿐이라고 생각해보자. 그건 지나치게 제한적이다. 그러면 나는 배우가 되고, 내가 전하는 다르마는 연극이 될 것이다. 그건 내가 평생 하지 않은 일이다. 나는 스승이 내게 가르침을 전하라고 청했기 때문에, 그 일을 해야 한다고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들을 가르친다. 그래서 일이 힘겹거나, 피곤하거나, 비행기를 여러 번 타야 하고, 집을 떠나 있어야 해도 기쁘게 그 일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뒤편에는 내가 진실로 귀중하다고 여기는 일에 봉사한다는 동기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와 다른 사람들이 봉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니다. 주변 세계와의 만남, 신발을 벗어놓는 법과의 만남, 다음에 대화할 사람과의 만남, 이후 처할 상황과의 만남 등 순간순간 인간의 삶이 전개될 때 많은 것들이 있다. 당신의 삶에서 그런 순간이 생기면 “나는 무엇에 봉사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하라.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봉사할 때는 부가적인 혜택도 있다. 단지 사랑하는 것을 더 많이 얻으려고만 할 때보다 사랑하는 것에 봉사할 때 훨씬 더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삶의 미지의 부분과 두려움에 직면하여 굳게 서 있으면, 두려움은 우리와 적대하지 않고 위협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두려움은 새로운 것, 즉 막 인식되거나 곧 일어날 미지의 어떤 것의 전조가 된다. 거기엔 이상한 게 아무것도 없다. 미지는 끊임없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삶과 존재에서 불가결한 부분이므로, ‘나’와 지금 그대로의 ‘나’에게 필수적인 부분이다. 우리가 멈추어서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두려움에 휘둘릴 것이다. 멈추어서 두려움을 직면할 때,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면서 완전히 고요하고 평안할 때, 두려움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두려움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움을 적대시하거나 도망가지 않으므로 삶과 내면의 풍경은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다.

삶은 매 순간 거울처럼 우리가 신성한 생각, 소속, 관점을 보호하고 있음을 비춰준다. 우리가 이를 보호하고, 또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이 여기에 도전할 때 반발하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그들은 우리의 마음이 어떤 사상이나 소속, 관점을 감싸고 여기에서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것에 도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정체성을 형성하든, 우리가 무엇과 동일시하든 삶은 상관하지 않는다. 삶은 그저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우리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남들이 지지하지 않을 때마다, 또는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에 도전하는 것처럼 삶이 펼쳐질 때마다, 우리의 정체성들은 볼링공과 핀들처럼 서로 충돌한다.

마음속 생각과 가슴속 감정을 놓아버리는 게 다가 아니다. 그렇게 해도 다시 생각하거나 다시 느끼지 않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생각과 감정의 차원에서 깨어나도 여전히 본능적인 원초적 에고를 가지고 있을 수 있고, 그런 자아의 존재 수준은 계속 우리를 두려움에 머물게 할 수 있다. 에고와 자아의 주먹을 펼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어떤 사람들은 그때 미쳐 버릴까 봐 두려워하는데, 이는 통제력을 잃을까 무서워하는 것이다. 그런 두려움을 밀고 나가는 것은 적절한 생각이 아니다. 기꺼이 하려는 마음이 있을 때 두려움을 가장 현명하게 다룰 수 있다. 영적 수행이 발전하면 유일하게 소멸하는 것은 자아에 대한 집착임을 알아차리게 되고, 보다 깊은 곳에 접근하는 법을 배우고, 놓아버리는 것이 기분 좋게 느껴진다. 두려움의 주먹을 꽉 쥐는 것이 바로 문 없는 문이며 의식 안에서 수축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양말’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차나 비행기나 컵이 아니라 양말을 가리킨다. 그리고 양말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양말이 아닌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중략) 하지만 본성을 말할 때, 본성은 다른 것과 상반되는 하나의 사물이 아니다. 본성은 의식의 모든 내용을 초월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광대한 존재이다. 생각, 느낌, 다른 모든 것 등 마음의 내용과 더불어, 눈을 뜰 때 보이는 것, 느끼는 것, 듣는 것은 모두 의식의 내용이다. 반면에 우리의 본성은 상반되는 것이 없고, ‘타자’가 없고, 그것 아닌 것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이제 우리가 마주치는 어려움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는 우리를 속이기 쉽다. 우리의 생각과 자아의 개념, 자아가 쌓아올린 관념을 모두 넘어서는 우리 존재라는 실재를 어떻게 말할 것인가? 본성을 정의하려 하면 항상 그것을 제한하게 되지만, 본성에는 제한이 없다. 따라서 반드시 어떤 시적 감수성을 가지고 말을 사용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신, 불성, 브라만, 혹은 그 무엇이든, 우리가 선택한 다른 것에 대한 정의에 얽매이지 않은 채 상반됨이 없는 것을 가리킬 수 있고 본성을 가리킬 수 있다.

깨어났을 때도 자신이 깨어났다는 생각을 믿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곤란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깨어난 후에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깨어났어.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건 모두 진실이야.” 이건 정말 우스운 말이다. 어떤 말은 다른 말보다 실재를 더 정확히 나타낼 수 있고, 모든 생각이 허위인 건 아니다. 어떤 생각은 진실에 더 가깝고, 다른 생각은 진실에서 더 멀고, 어떤 생각은 진실과 전혀 관계없고, 또 어떤 생각은 다른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계속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세계?실제 세계가 아니라 실제를 표상하는 세계?에서 살지 않도록 거기서 벗어나야만 한다. (중략)
“생각은 생각이 나타내는 실제 그것이 아니다.” 이 말을 철저히 가슴에 새기고, 철저히 골수에 새기고, 온몸을 흐르는 혈액에 녹게 하라. “생각은 실제 그것이 아니다.” 그 다음에 ‘실제를 모른다’는 중간 단계를 받아들이면, 미지로 들어갈 때 미지는 어떤 장소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미지는 미지의 개념 아래 있는 생생한 실체이다.

자기가 곧 에고의 마음이라고 여긴다면 죽음은 실제이다. 반면에 존재의 전체성(all-ness)으로 깨어난다면, 즉 자기가 전체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여긴다면, 죽음은 생명이 특정한 형태를 취하는 것 말고는 어떤 것의 종말도 아니다. (중략) 태어남?삶?죽음의 ‘중대한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존재와 삶 자체는 부단히 변하고 있지만, 형태를 바꾸어도 생명 자체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걸 아는 것이다. 우리가 전체와 동일시할 때, 우리는 소위 태어남의 순간부터 존재하게 되는 게 아니고, 소위 죽음의 순간에 존재를 중단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생명은 근본적이고 철저한 변화를 겪는다. 태어남은 생명의 형태가 철저히 변하는 것이고, 죽음도 생명이 더 이상 이전에 알려진 형태가 아니게 되는 철저한 변화이다. 이런 이해는 변화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여기서 내가 가리키는 것은 “나는 무엇인가?”라는 보다 깊은 깨달음이다. 영적 성장이나 깨달음의 결정적인 부분은 경계라는 환각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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