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안아주기
최연호
소확혐, 작지만 확실히 나쁜 기억이 주는 두려움
우리는 어떻게 나쁜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나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좋은 기억이 없는 사람도 없다
‘좋은 경험하기’와 ‘좋은 기억으로 왜곡하기’가 주는 망각의 기술
책속에서
문제는 어른들도 나쁜 기억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이와 가족 모두가 나에게 보여준 것은 두려움이었다. 그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한 과정 중에 아이는 여러 증상을 호소하는 신체화장애를 나타냈다. 그것은 아이가 나쁜 기억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던 것이다. 아파하는 아이들과 가족을 상대로 얘기를 듣고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너무나 많은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의학 교과서에는 전혀 기술되어 있지 않은 이 상황들을 내가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까 고민되었다.
내 입을 막고 있는 실리콘 관의 냄새는 어느 음식보다 더 역겹게 느껴진다.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직감한 시우는 두려움이라는 정서 기억으로 편도체를 크게 활성화하게 된다. 하루하루 지나면서 똑같은 상황의 반복은 시우의 의식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해마가 정보를 받아 시각 피질과 후각 피질 그리고 청각 피질에 장기 기억을 전달하는 것이다. 반복은 습관이 되고 결국 ‘조건화’에 이른다. 조건화는 뇌신경 세포들이 반복적으로 전기 신호를 전달하면서 발생한다. 두렵고 위험한 상황을 맞이했을 때 나중에 다시 닥칠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억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암묵적으로 편도체가 움직였지만 결국에는 해마가 의식의 기억으로 장기 기억을 남긴다. 수미와 시우가 가장 두려워했던 항문과 입의 나쁜 기억은 조건화되어 남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만의 자동적 공포를 떠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뇌는 우리 몸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위험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몸에게 다른 일을 하지 않도록 명령한다. 그래서 두려움이 조건화되면 우리는 위험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지만 다른 새로운 경험은 하지 못하게 된다. 두려움 앞에서 우리는 무기력해진다.
트라우마가 생기면 해마와 편도체를 포함하는 기억 체계에 혈류가 증가하지만 장기적으로 해마로 가는 혈류는 감소해 결국 스트레스 호르몬은 해마의 크기를 작아지게 만든다. 이와 더불어 기억 능력이 손상됨은 물론이다. 또한 학대당한 아이들의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의 신경 섬유 수가 감소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 영향으로 아이는 생각과 느낌을 제대로 연결할 수 없게 되고 자기 감각을 상실하며 지나친 걱정과 무언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다음의 예를 보자. 항생제 하루 두 번, 기침약 하루 세 번, 가래약 하루 세 번, 스테로이드 하루 두 번, 소염제 하루 세 번, 소화제 하루 세 번. 이것은 주변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소아의 감기 처방전이다.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감기는 원래 바이러스 질환이어서 특별한 치료약이 있는 것은 아니다. 증상을 완화하는 정도의 소량의 약과 수분 및 영양섭취면 충분하다. 그런데 왜 이러한 처방이 나올까?
소확혐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매우 흥미로운 것은, 나쁜 기억은 과거에 경험했던 것인데 사실상 그 기억의 일부에는 현재의 감정이 끼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소확혐이 두려워 다시 경험할 것을 꺼리는 우리는 잠재적인 손실을 상상하는 데 있어서도 현재의 나쁜 감정이 포함된 과거의 나쁜 기억에다 현재의 나쁜 감정이 또 포함된 미래의 나쁜 상상을 하게 되므로 나쁜 감정은 더욱 강화되어 편집증적인 집착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나쁜 기억은 이상하게 잊히지도 않는다. 건망증이 심해져도 소확혐만은 초롱초롱하다. 건망증은 해마에만 들락거리고 편도체 안으로는 감히 내딪지도 못하니, 편도체에 뿌리 박힌 나쁜 기억은 잊으려 노력해서 더 못 잊고 망각에 맡기고 싶어도 문득문득 떠오른다. 나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 세계 곳곳에 알박기를 해놓은 소확혐은 꼬리인 주제에 몸통을 흔들어버린다. 꿈쩍 말아야 할 큰 몸집이 꼬리 때문에 쉽게 흔들리니 꼬리를 잘라버려야 한다는 생각만 간절해진다. 뇌와 꼬리는 물리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어찌나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꼬리가 잘리기는커녕 머리 행세를 한다. 젊어서 전전두엽을 충분히 이용하고 좋은 경험을 많이 한 치매 환자는 순하고 ‘예쁜 치매’로 가게 되고, 나쁜 기억에만 집착하고 늘 불안해하던 치매 환자는 화를 잘 내는 ‘미운 치매’로 간다. 건망증이 심해지고 경도의 인지 장애를 앓으며 치매가 되더라도 소확혐은 끝끝내 살아남는 것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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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 심리컨설턴트 박세니입니다. 어떤 영역에서든 큰 결실을 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력한 멘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세계 최고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멘탈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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