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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마음과 질병의 관계는 무엇인가? - 뤼디거 달케(Ruediger Dahlke),토르발트데트레프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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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과 질병의 관계는 무엇인가?

뤼디거 달케(Ruediger Dahlke),토르발트데트레프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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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병은 ‘조화에서 벗어나는 것’ 내지 ‘지금까지 균형을 이루던 질서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우리는 나중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병이 사실은 균형을 회복시켜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조화가 깨지는 것은 의식 속의 정보 면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몸속에서는 단지 드러나기만 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 몸은 의식, 그리고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과 변화가 표현되는 영역 혹은 구체화되는 영역이다.

여기에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역설적인 법칙성의 본질이 있다. 인간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에 가장 많이 몰두한다. 이때 인간은 거부당한 원리에 너무나 가까이 다가가 그것을 직접 경험할 정도가 된다! 이 마지막 두 문장은 꼭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어떤 원리를 거부하면 해당 인물은 반드시 그 원리를 직접 경험하게 된다. 이 법칙에 따라 아이들은 그들이 너무나 싫어했던 자기 부모의 행동 방식을 나중에 언젠가는 받아들이고, 반전주의자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호전적이 되고, 도덕주의자들은 방탕해지고, 건강제일주의자들은 중병에 걸리게 된다.

건강하게 살려는 노력이 더욱 병을 불러온다. 우리는 이 표현이 이 시대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결국 의학은 예방 조처를 점점 더 확대하는 데 힘쓰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건강에 좋은 자연 생활’의 붐을 타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것은 독소를 다루는 본능적인 태도에 대한 해결책으로는 확실히 옳고 환영할만한 것이지만, ‘병’이라는 테마와 관련해서는 정통 의학이 취하는 해당 조처들만큼이나 하찮은 것이다. 정통 의학과 자연치유법은 모두 병을 실질적으로 예방할 수 있다고 가정하며, 어떤 방법을 동원해 병에 걸리는 것을 막아줄 수 있는, 그러니까 그 자체로 건강한 인간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인간은 병들어 있다”는 말로 사람들의 깨우침을 촉구한다.

병자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병자는 항상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 것일 뿐이다. 오직 ‘깨달은 자’만이 더 이상 그림자를 가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진술은 어떤 가치 판단을 내리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간이 자신을 어떤 상황의 희생양이라고 여기는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해주려는 것이다. 병자의 그런 착각은 그 스스로 자신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박테리아도 자연 방사선도 병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들을 자신의 병든 상태를 구체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한다(같은 말이라도 다른 영역에 적용하면 훨씬 더 당연하게 들린다. 물감도 캔버스 천도 어떤 그림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들을 자신의 그림을 구체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갈등은 우리가 어떤 영역을 통해 경험하든 항상 괴로운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전쟁이든, 마음속의 반항이든, 아니면 질병이든 상관없이 결코 기분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분 좋은 것이냐 아니냐는 우리의 논증이 허용되는 측면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단 어떤 것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이런 문제는 전혀 제기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 감정의 분출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몸에서 분출(농양)이 일어난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대해 더 기분 좋은 것이냐 혹은 더 나은 것이냐의 문제까지 제기할 수 있을까? 병은 정직해지도록 만든다!

당뇨병 환자는 단 음식을 먹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당분을 받아들여 자신의 세포를 구성하는 물질로 만들 능력이 없다. 이 상황의 이면에는 사랑을 성취하고픈, 털어놓지 못한 소망이 숨겨져 있다. 이것은 사랑을 받고, 그것을 완전히 안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과 짝을 이루고 있다. 당뇨병 환자는 유달리 ‘대용 식품’을 먹고 살아야 한다. 이것은 자신의 진정한 소망을 대신하는 식품이다. 당뇨병은 몸 전체를 지나치게 산성화하며, 심지어 의식 불명 상태까지 불러오기도 한다. 우리는 이 산성을 공격 성향의 상징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과 공격 성향, 당분과 산(신화적으로는, 사랑의 신과 전쟁의 신)이라는 이러한 양극성과 마주치게 된다. 우리 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준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속에서 감정이 끓어오른다.

인간이 배우자를 통해 자신을 깨달아야 하듯이, 콩팥도 외부에서 오는 ‘이물질들’이 자기 자신이 몰입하고 발전하는 데 중요한 성분임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콩팥이 ‘배우자 관계’ 그리고 ‘관계를 맺는 능력’이라는 테마와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는 우리의 일상 활동의 특정한 습관들에서도 충분히 생각해보고서 논의해볼 수 있다. 사람들은 친분을 맺으려고 모임을 가질 때마다 대개 술을 마신다. 이것은 술이 ‘접촉 기관인 콩팥’을 자극하고, 그렇게 해서 정신적으로 관계를 맺는 능력도 활성화시키기 때문에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가 가득 찬 술잔이나 맥주컵을 들고 함께 건배를 하면 금세 훨씬 더 가까워진다. 이렇게 우리는 술잔을 부딪침으로써 서로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서도 다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거리감이 있는 존칭인 ‘당신’을 친밀한 근칭인 ‘자네’로 바꾸는 일도 거의 언제나 술을 마시는 의례와 연관되어 있다.

자신의 생각이 확고한 견해와 판단으로 굳어지면, 또한 머지않아 몸속에서도 원래는 흘러야 할 것이 응고된다. 병 때문에 오래 누워 지내면 혈전증 위험이 높아진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병 때문에 오래 누워 지내는 것은 움직임의 극이 더 이상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보여준다. “만물은 흐른다”라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했다. 양극적인 존재 형식 속에서 생명은 움직임과 변화로 모습을 드러낸다. 오직 한쪽 극만 충실히 따르려는 모든 노력은 결국 정체와 죽음으로 이어진다. 불변의 것,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양극성이 사라진 곳에 놓여 있다. 그곳에 도달하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에 내맡겨야 한다. 왜냐하면 변화만이 우리를 변화 불가능한 곳으로 데려다주기 때문이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우선 의식적으로 ‘낮을 마감하는 법’을 배워 익혀야 할 것이다. 그래야 밤과 밤의 법칙들을 완전히 따를 수 있다. 그 외에도 자신의 무의식의 영역에 신경을 쓰는 법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어디서부터 불안이 생겨나는지 알아낼 수 있다. 무상함과 죽음이 불면증 환자에게는 중요한 테마인 것이다. 그에게는 남에 대한 원초적 신뢰와 헌신할 능력이 없다. 그는 자신을 ‘실천가’와 너무나 동일시해서 자신을 내맡기는 일을 해내지 못한다. 여기에 나오는 테마들은 우리가 제2부 6장에서 오르가즘 문제를 다룰 때 이미 접했던 것과 거의 같다. 잠과 오르가즘은 죽음의 축소판이며, 강한 자기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위험으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우리 생활에서의 밤의 측면과 화합하는 것이 확실하게 잠들 수 있는 방법이 된다.

성공을 추구하는 것은 항상 사랑을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를 들어 쇼와 영화 분야에 코카인이 특별히 널리 퍼져 있다. 사랑을 받고자 하는 갈망은 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 특유의 문제점이다. 자기과시적인 연예인은 사랑을 갈망하며, 관객들의 총애를 통해 이 갈망이 충족되기를 기대한다(이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정 때문에 그는 한편으로 더욱 ‘멋지게’ 꾸미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적으로 더욱 불행해진다!). 이제 환각제를 복용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여기서 실질적인 중독물은 흔히 자신이 추구하던 사랑을 대신해준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암은 엉뚱한 영역에서의 사랑이다. 완전함이나 합일(合一)은 오직 의식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을 뿐, 물질에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물질은 의식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무상한 형상계(形相界)에서는 인간은 불멸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이루어낼 수 없다. 비현실적 이상주의자들의 그 모든 힘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세상은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갈등과 문제점이 없고, 불화와 대결이 없는 그런 세상 말이다. 병과 죽음이 찾아오지 않는 건강한 사람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랑도 결코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형상계는 경계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형상들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자신의 의식 속에서 자유로워진다면, 이 모든 목표는―누구에 의해서나 어느 때든―실현될 수 있다. 양극적인 세계에서 사랑은 집착하도록 만들며, 통일성 속에서는 흘러가게 해준다. 암은 잘못 인식된 사랑을 보여주는 증상이다. 암은 오직 참된 사랑 앞에서만 존경심을 보인다. 참된 사랑의 상징은 심장이다. 심장은 암에 걸리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신체 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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