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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사이에 대하여 - 최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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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 대하여

최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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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목표를 향해 돌진해야 하는 맹수들은 눈 사이가 좁고 정면을 향한다. 맹금인 독수리도 부리부리한 두 눈이 가운데로 몰려 있다. 반면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주변을 끊임없이 두리번거려야 하는 초식동물들은 겁먹은 눈빛에 눈 사이가 멀다. 기다란 얼굴의 측면에 붙어 적들을 경계하기 좋게 되어 있다. 그래야 생존에 유리해서일 것이다. 인간의 눈은? 호랑이 사자보다, 심지어 개 고양이보다도 눈과 눈 사이, 미간이 붙어 있다. 시력으로 따지면 맹수뿐 아니라 매나 독수리에게도 훨씬 못 미치지만 맹수보다 포악한 사냥꾼이란 뜻일까?

사부작사부작, 겨울 강가를 걷는다. 귓불을 스치는 바람이 얼얼하다. 꽃인지 씨앗인지 날벌레인지, 갓털들을 훌훌 떠나보낸 억새들이 빈 몸으로 서서 칼바람을 맞는다. 쓰러졌다 일어났다 다시 또 쓰러졌다 기어이 서로를 부추기며 일어선다. 찬바람에 뿌리가 얼어 버리면 발밑 풀싹들 샛노란 꿈마저 얼어 터질라, 그렇게 서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지켜내지 않으면 바람 구두를 신고 허공을 떠도는 바랭이 방동사니 불한당 씨앗들에 대물림한 영토를 내주게 될지 몰라, 죽어서도 차마 죽지 못하는 억새들. 삶이란 기실 영역 싸움 아니더냐.

세상의 주인은 애초부터 말 아니었을까. 발도 날개도 없는 말이 인간의 몸 안에 똬리를 틀고, 숙주를 장악하고 이리저리 내몰면서 분열과 화합을 획책하는 것 아닐까. 연애도 정치도, 화해도 협상도, 알고 보면 말의 조화 속이다. 말이 통하면 ‘로켓맨’과 ‘늙다리 망령’도 친구가 되고 말이 막히면 한 침상에서 일어난 부부도 남남이나 진배없어진다. 세상이 갈수록 시끄러워지는 것도 온라인 오프라인을 종횡무진 오가며 힘겨루기와 판 가르기를 일삼는 말들의 불온한 지배욕 때문이다. 거칠고 탁하고 온기 없는 말들, 도발적이고 전투적인 말들이 기 싸움 샅바싸움으로 내 편 네 편을 가르며 평화를 잠식하고 불안을 유포한다. 은밀하게 서식하며 호시탐탐 바깥을 넘보는 숨은 말떼들을 조련하고 다스려내는 일이야말로 일생 말을 품고 말을 보내며 살아내는 인간들에게 부과된 중차대한 책무, 아니 소명 아닐까. 내장된 말들이 투명한 날벌레로 다 날아올라야 방전된 배터리처럼 이윽고 고요해지는, 그것이 우리네 육신일지 모른다.

인간은 그러니까 인+간이다. 사람 인(人) 자체도 사람과 사람이 기대고 받쳐주는 모양새지만 그 또한 완전히 공평하진 않다. 하나는 괴고 하나는 일어선다. 누군가 밑에서 떠받치지 않으면 비스듬하게라도 서 있을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가 인간이란 말이다. 거기에 또, 사이 간(間)이 하나 더 붙어야 비로소 사람을 의미하는 독립적인 단어로 유의미하게 작동한다. 사람의 사람다움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관계와 소통 같은 상호작용을 통해 스미고 물들이며 완성되어 간다는 뜻이다. 사람이 인(人)이 아니고 인간(人間)인 이유다.

아이들이 장난감이나 과자 따위를 소유하는 과정은 연인들의 사랑법과 비슷한 데가 있다. 첫눈에 반하진 않을지라도, 사랑은 일단 눈에서 시작된다. 눈이 먼저 클릭을 해야 마음이 쏠려 호기심이 생겨난다. 호기심이 궁금증으로 증폭되면서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욕망이 손으로 가만히 내밀어질 것이다. 무르익은 욕망이 입술로 혀로 옮겨지는 동안 머릿속에선 빠르게 손익계산도 할 터이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직행시키는 이 궁극의 미각을 이 사람과 오래 공유해도 좋을까. 내 안으로 뜨겁게 모셔 들여도 괜찮을까.

그럴 나이라……. 면역이 약해져 자주 감기에 걸리고 순발력 집중력 기억력이 없어지고 안 하던 실수도 자주 하게 되는, 그런 증상이나 징후들이 진즉부터 빈발하고 있었음에도 총체적 증후군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연한 사고나 우발적 해프닝일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 온 것 같다. 염색과 임플란트, 다초점 렌즈로 감춘 나이에 남보다 먼저 자신이 속아 아직은 멀쩡한 척, 애써 안 늙은 척 주눅들지 않고 당당해 했을지 모른다. 쭈뼛거리고 주춤거리다 아쉽게 놓쳐 버린 세월이 허무해 인생은 저지르는 자의 몫이더라고 뒤늦게 젊은 친구들을 독려하기도 했는데. 저지르는 일마다 사고요 실수니 남은 생의 목표를 ‘무사안일(無事安逸)’로 수정해야 하는 게 아닐지 모르겠다. “아무리 좋은 일도 아무 일도 없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던 게 운문선사였던가.

시드는 것, 사위는 것, 죽어가는 것들에 에워싸여 살고 있으면서도 그 또한 미구에 닥칠 자신의 운명이라는 사실에 다들 고개를 돌리고들 산다. 우울하고 스산하고 내키지는 않지만 한 번쯤은 죽음을 직시해 봐야 하지 않을까? 두려움의 원류가 무지(無知)이기도 하고 좋으나 싫으나 빠르거나 늦거나 우리 모두 기어이 그 종착점에 당도하고야 말 테니. 죽음이란 어쩌면 어떤 존재도 되돌아 나올 수 없는 거대한 흡반(吸盤), 생명의 빛을 거두어들이는 블랙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존재 자체가 무화되어 버리는 일에 의지와 상관없이 떠밀리고 있다는 두려움. 어쩌겠는가. 생명은 모두 산 채로 죽는 것을.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살아있는 동안엔 죽음이 없고 죽으면 또한 살아있지 않으니 죽음 자체를 걱정하고 두려워할 일은 아니다. 두려운 건 오히려 죽음에 이르는 삶의 과정일 뿐.

사랑이 짝짓기를 위한 한시적 술래놀이에 다름 아님을 지나간 시간들이 우리에게 일깨운다. ‘사랑은 뇌의 착각, 1년이면 완쾌된다’는 뇌 과학자의 냉엄한 진단을 이제 나는 더 이상 비웃지 않는다. 양성생식의 대가로 불멸성을 잃게 된 개체들이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완전체를 회복하고 합체된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함으로써 개체가 아닌 종족의 불멸을 도모하는 방편. 그것이 생물들의 짝짓기 아닌가. 생식이 끝난 몸뚱어리는 아무런 죄 없이, 아니면 온갖 죄목이 덮어씌워져 시나브로 폐기처분당하는 것이 이 행성의 뒤처리 방식이고.

죽어 다시 무엇이 되어야 한다면 나는 나비가 되고 싶었다.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게, 아니아니 최대한 가벼워져서 향기롭고 우아하게 팔랑거리고 싶었다. 우리를 지상에 붙들어 매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중력이란 어쩌면 인연과 집착의 무게 아닐까. 마음 닿는 모든 걸 내려놓고 어제도 내일도 없이 나, 지금, 여기를 살 수만 있다면 사는 일이 훨씬 가벼울 것 같았다. 나비들 역시 푸성귀를 뜯으며 배밀이를 하는 애벌레의 시간을 통과해내야 하고 번데기나 고치로 스스로를 가두는 어둠을 견뎌낸 끝에야 날개를 얻지만 일단 날개를 장착하기만 하면 이전과는 단절된,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 펼쳐진다. 질기고 끈적끈적한 시간의 중력을 벗고 가벼워진 그들의 세상을 환생, 아니 부활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아주 오래전, 시인이 되려다 실패한 적이 있다. 시를 몰라 실패했는지 실패해서 시를 모르는지, 시는 지금도 내 안에만 갇혀 있다. 멀어진 것, 아스라한 것, 이것과 저것의 경계에서 어릿어릿하다가 명멸해 버리는 그 모든 사라짐과 아슬아슬함을 나는 다 ‘시’라 통칭한다. 고압 전류처럼 순식간에 뇌리를 관통하는 빛살, 혈관 속에 몰려다니다 시시때때 나를 들뜨게 하는 영혼의 혈전 같은 것, 현기증 같은 것. 흐린 기억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멀어진 약속 같은 것, 언어가 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말의 유충 같은 것, 그 모든 아득하고 그리운 것들이 시라고 뭉뚱그려져 내 안 어딘가에 방치되어 있다. 초록이 되지 못한 내 안의 연두. 그 모호한 언어 더미들.

제주의 말들은 달리고픈 본능을 잊어버린 것 같다. 말의 목은 풀밭에 닿기 알맞은 길이와 각도로 진화한 것 같다. 길고 우수 어린 속눈썹도 먼 평원을 바라보기 좋게 살짝 올라가 있는 대신 15도쯤 아래로 사선으로 처져 있다. 아름다운 근육질의 몸매로 그저 풀이나 뜯다가 굵은 호스처럼 오줌 줄기를 내갈기다가 따뜻한 모래 언덕에 모로 누워 잠들어 버리는 말들. 저렇듯 평화롭게 풀을 뜯는 것이 진정 말들의 본 모습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그들을 길들이기 전까지는. 그래도 누군가 말해 주면 좋겠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사람은 걷고 말은 달려야 한다고. 군살 없이 매끈한 근육질로 바람을 가르며 갈기를 휘날리는, 잘생긴 준마의 역동적인 실루엣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사람이 얼마나 독한 짐승인지 인간들의 서식지인 도시에서는 풀 한 포기 마음 놓고 뿌리내리지 못한다. 사자도 독수리도 근접 못 하는 인간의 울타리에, 아니 인간의 몸 안까지 파고들어 양분을 빨고 새끼를 싸지르는 게 벌레들 아닌가. 변태를 거듭하고 몸피를 줄이며 환경에 적응해 온 덕도 있겠으나 천적인 인간의 뇌 안에 극단적 편견과 적개심을 심어둠으로써 스스로를 기피하게 하는 방어전략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 피하지.’ 하는 시쳇말을 최고의 명심보감으로 유전자 깊이 새겨 넣고 자기 보위법으로 활용해 왔을 것이다. 내 손바닥 안의 날벌레처럼 운 없는 개체들의 희생이야 어쩌지 못한다 해도 종의 번성에는 기여했을 테니.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은 빛과 어둠, 남자와 여자, 목적과 과정, 순간과 영원처럼 짝을 이루는 개념이나 대상들을 대척점에 떨어뜨려 두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자주 잊는 것 같다. 어둠이란 빛의 반대가 아닌 빛의 부재 상태이고 남자와 여자는 대립이 아닌 상보(相補)적 존재이며 삶은 목적이 아닌 과정 자체임을. 키 작은 연필들이 묵언으로 설법한다. 시시한 것들에 마음을 포개는 일이 도(道)의 시작이라면 컴컴한 내면에 미분화된 채 응어리져 있는 말들을 바깥으로 날아오르게 해주는 일도 수행(修行)의 한 방편일 거라고. 과정에의 몰두와 도취야말로 최고의 법열(法悅)이고 니르바나라고.

길들이거나 축출하거나. 그것이 타 생명체를 다루는 인간의 방식이지만 인간만이 일방적 승자는 아니다. 길들이다가 오히려 길들여져 버리는, 시중을 들다가 시종이 되어 버리는 딱한 족속 또한 인간이기도 하니. 떠돌이 유인원을 붙박이 인간으로 눌러 앉힌 농작물들은 때 맞추어 물을 주고 해충을 잡아 주는 인간들 덕분에 안정적으로 번식해 왔다. 가축이라는 이름으로 순치된 짐승들도 인간의 호위를 받으며 지속적으로 개체수를 늘리고 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는가. 줄 것 주고받을 것 받으며 거래도 하고 보상도 받는 세상살이의 이치를 저들이 먼저 터득하여 꾀 많고 욕심 많은 잡식성 인간들을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과가 둥글고 아름다운 것은 이브에게 그랬듯 대상을 유혹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완벽한 형태의 구(球)에 가까울수록 햇볕을 골고루 받고 부피 대비 표면적이 작아 최소한의 포장재로 제 몸을 감쌀 수 있어서일 것이다. 달걀은 어떠신가. 사과처럼 데굴데굴 구르면 부딪혀 깨질 염려가 있고 굴러가 둥지를 벗어나면 암탉이 품어줄 수가 없기 때문에 아주 둥글지만은 않은 타원형으로, 한쪽은 갸름하고 다른 쪽은 펑퍼짐하게 설계되었을 것이다. 익은 열매가 달콤하고 향기로운 것이 대상에게 먹혀 자리를 옮겨 앉기 위해서이듯, 어린 열매가 시고 떫고 푸른 이유도 익기 전에 먹히지 않기 위해서겠다. 단지 우연만이 아닌 당위와 섭리와 필연성 같은 것이 외부로 현현(顯現)된 게 껍데기라면 나는 왜 이렇게 생겨먹은 것일까. 더 섬세하고 강렬하거나 고상하고 온아우미하거나 세상 남자들을 다 때려눕힐 백치미라도 풍겨내면 좋았을 것을.

눈에 콩깍지가 씌어야 사랑을 한다고들 하지만 사랑은 사실 콩깍지가 아니다. 눈을 감는 게 아니라 눈을 뜨는 일이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그의 그다움에, 내밀하고 고유한 그만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한없이 섬세해지고 다감해지는 일,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에 빠지면 상대에게가 아니라 평소보다 더 넓어지고 깊어지는 제 마음의 진폭에 스스로 놀란다. 가려지고 감추어졌던 세상이 열리고 눈동자를 가리고 있던 깍지가 벗겨져 세상이 온통 빛나 보이는, 그 개안(開眼)이 사랑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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