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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왕으로 산다는 것 - 신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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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으로 산다는 것

신병주

정통 역사학자로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건국대학교 사학과 신병주 교수의 책으로, 「매경이코노미」에 연재한 '왕으로 산다는 것' 칼럼의 전체 내용을 한 권에 모았다. 태조부터 순종까지 조선의 27명 왕 대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왕이 되기까지의 과정, 왕의 가족, 왕이 된 후의 정책, 조언을 받은 참모, 왕의 라이벌 등 왕의 주변 인물이나 주요한 사건들의 면모를 모두 담으려고 노력했다.

조선의 왕은 고대나 고려의 왕들에 비해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지는 못했다. 제도가 정비되면서 왕을 견제하는 장치도 적절히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정치사에서 큰 축을 차지하는 왕권과 신권의 문제는 결국 왕권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행사하느냐에 따라 갈등의 양상을 보이기도 하고 조화를 이루기도 했다. 세종과 같은 왕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뜻에 맞게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던 측면이 크다.

조선의 왕들은 최고결정권을 가진 막중한 책임을 다하는 위치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을까? 이 책을 통해 조선 왕들의 본받아야 할 업적과 태도, 반면교사 삼을 실패한 면모들을 역사 속으로 들어가 다양하게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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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그렇다면 세종이 앓았다는 등창, 소갈증, 임질 등은 구체적으로 어떤 병들일까? 《세종실록》의 기록을 오늘날 전문의에게 문의한 결과 안질은 요즘의 백내장, 소갈병은 당뇨질환, 임질은 전립선염이나 방광염을 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당뇨병은 여러 합병증을 요하는 병으로 무엇보다 절대 안정을 취하는 것이 최선의 회복책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끝까지 과로의 길을 걸었다. 말년 세자인 문종을 시켜 섭정을 하게 하면서 큰 부담에서는 벗어났지만 훈민정음 창제와 같은 대사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세종은 가족사의 불운과 각종 질환 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역사적 책무를 다했다. 세종의 모 습이 우리에게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보통 사람들과 같은 고민과 걱정을 했던 그의 인간적인 모습 때문은 아닐까?

- 제1장/ 창업과 수성, 나라를 세우고 지키다 중에서

광해군의 실리외교는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광해군과 그를 지원하고 있던 대북정권을 무너뜨린 서인 세력에게 그는 한낱 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위시킨 패륜적인 국왕, 전통적인 국제적 신의를 저버린 인물, 자신의 탐욕에 눈이 멀어 무리한 궁궐 공사로 백성들을 고역에 빠지게 하고 종묘사직을 무너뜨린 군주로 평가절하 되었다. 특히 1623년 인조반정을 성공시키고 광해군을 폐위시킨 서인 세력이 폐모살제와 함께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행위로 매도함으로써, 광해군의 실리 외교는 조선시대 내내 그 빛을 보지 못했다. 연산군이야 검증된 폭군이므로 그리 억울할 것도 없겠지만 광해군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가 수 행했던 강력한 전란 복구 정책이라든가 실리적인 외교를 통하여 조 선이 불바다가 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했던 국제 감각은 오늘날에도 재평가되어야 할 부분이 많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경쟁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는 21세기, 광해군이 보여주었던 능동적인 실리 외교의 지혜는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 제3장 / 왜란과 호란의 시대 중에서

건강해서 장수한 만큼 영조는 긴 재위기간 동안 서민을 위한 많은 정책을 폈다. 1749년 《국혼정례》를 정해 혼인에서의 사치를 막고, 1752년 호조의 경비와 예산에 대한 규정인 《탁지정례》를 제정하여 국가 재정의 절약을 꾀했다. 이외에 가체加? 금지령을 내려 여인들의 사치와 낭비를 방지하는 데 주력했다. 가체는 그 머리카락 자체의 값 이 비싼 것이 아니라 머리 장식 때문에 높은 가격이 매겨졌고, 조선 후기에는 궁중뿐 아니라 여염집에서도 여인들이 많이 사용했다. 가체는 사치할 품목이 많지 않았던 유교 사회인 조선의 최고 사치품으로, 품질이 좋은 가체는 웬만한 집 한 채 값을 호가하기도 했다. 혼수로 신랑 집에서 신부에게 가체를 해주어야 하는데 그 값이 부담되어 혼례를 미룰 정도라니 그 사치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조의 가 체 금지령으로 인해 다른 머리 장식 중 하나인 족두리가 대신 성행하기도 했다.

- 제5장 / 부국과 중흥의 시대 중에서

《일성록》에는 신하들이 올린 상소문을 비롯하여 왕의 동정과 윤음 綸音(임금이 백성이나 신하에게 내리는 말), 암행어사의 지방 실정 보고서, 가뭄·홍수 구호 대책, 죄수 심리, 정부에서 편찬한 서적, 왕의 행차 시 처 리한 민원 등이 일별·월별로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주요 현안을 요점 정리하고 기사마다 표제를 붙여서 열람이 편리하도록 했다. 《일성록》 에는 위민爲民 정치를 실천한 정조의 모습도 잘 나타나 있다. 격쟁擊錚(꽹과리를 두드려 억울함을 호소함), 상언上言(왕에게 아룀)에 관한 철저한 기록 이 그것으로서 《일성록》에는 1,300여 건 이상의 격쟁 관련 기록이 실려 있다. 정조는 행차 때마다 백성들의 민원을 듣고 그 해결책을 신하들에게 지시함으로써 최대한 백성들의 의견을 반하려 한 것이다.

- 제6장 / 개혁, 정치와 문화의 부흥 중에서

정부의 정책은 이처럼 갈팡질팡했고, 미온적인 대처는 결국 제2, 제 3의 진주 민란을 불러오게 되었다. 당시 농민 반란의 주요 원인은 세도정치의 정치 기강 문란에서 파생한 탐관오리와 아전들의 농민 착 취다. 그러나 허약한 왕실과 이미 부정부패가 관습화된 관리들에게 더 이상 문제 해결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이미 조선 사회의 행정력 은 지방 통제에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실권이 없이 추대된 왕 철종과 자신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려 했던 세도정치 권력 또한 백성들의 불만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1862년의 임술민란 이후에도 농민 반란이 계속 일어난 것은 국가가 근본적으로 농민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대원 군 집권 시기인 1869년의 농민 반란을 위시하여 1871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이필제의 난은 모두 1862년 진주 민란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농민 반란이었다. 1894년에 일어나 전통 시대 해체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동학 농민 운동 또한 진주 민란이라는 전국 규모 반란의 경험이 이어진 것이었다.

- 제7장 / 시련, 나라가 기울고 백성이 신음하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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