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진정한 친구 하나 없는 걸까
조은강
관계가 너무 어렵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들을 모은 에세이 형식의 자기계발서다. 진정한 친구가 없이 마음이 텅 비어 있다면, 관계 맺기에 서툴다면 이 책을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듯 편하게 읽어보자. 저자는 관계 때문에 힘들어하는 당신에게 어른이 되어서도 얼마든지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따뜻한 메시지를 전한다.
남들과 같은 색깔의 관계가 아닌 백만 명 중의 하나인 자신에게 오롯이 편안한 관계를!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사람과 함께하자. 그들과 드라마를 만들고 그 속의 주인공이 되어라. 그것만으로도 인생은 의미가 있다.
저자는 누구도 관계의 달인이 될 수도, 될 필요도 없다며, 우리는 그저 내 인생에 어울리고 나에게 편안한 관계 맺기의 방법만 찾으면 된다고 말한다. 세상에는 혼자 왔지만 많은 사람을 만나 좋은 추억을 가득 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지금은 혼자라고 해도, 외롭다고 해도 그 시간이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살다보면 언제나 새로운 국면이 전개된다. 더 늦기 전에, 더 힘들어지기 전에 관계 맺기의 실타래를 하나씩 설렌 마음으로 풀어보자.
책속에서
성인이 되어서도 관계 맺기의 어려움은 계속된다. 이젠 동성 친구뿐만 아니라 이성 친구, 나아가 애인, 인생의 동반자까지 선택해야 하는 과제가 닥쳐온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떻게 다가갈 것인지, 다가오는 사람은 어떻게 대할 것인지 마땅한 대처법을 알지 못한다. 점점 사람 만나기가 두렵고 가벼운 우울 증세까지 느껴진다. 크레파스를 빌리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아이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이 세상에 사는 한 이 궁지에서 빠져나갈 수 없음을. 세상은 그야말로 관계의 연속이었다.
알폰스 데켄이라는 독일 교수는 같은 책에서 웃는 얼굴에는 4개의 철학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건강을 위한 스마일, 둘째는 배려와 사랑의 표현으로서의 스마일, 셋째는 일상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스마일, 넷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스마일이 그것이다. 마지막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스마일은 어떤 괴로운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궁지에 몰려 난처한 상황에서도 미소 지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은 얼마나 성숙한 인격이겠는가. 조금만 힘들어도 얼굴에서 불만을 표현하는 사람과는 확실히 다를 것이다.
그러면 상대가 날 귀찮아하는 조짐을 보일 때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 첫째, 귀찮음은 아직 적대감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자. 즉 부정적인 감정의 시작일 뿐 절정은 아니다. 솔직히 서로 싸운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다만 좋지 않은 타이밍에 연락을 꾀한 것뿐이다. 남친과 싸우고 있는데, 지갑을 잃어버려 황망한데, 상사에게 야단맞은 후 창피해서 어딘가 숨어버리고 싶은데 이모티콘과 함께 날아온 천진난만한 메시지에 대꾸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너무 빨리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상대에게 한 템포의 여유를 주도록 하자. 나는 A에게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며칠 뒤 다시 연락해본다면 상대도 다른 태도를 보일지 모른다.
“어떤 사람은 평범한in flat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잘난in satin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제법 그럴싸한in gloss 사람을 만나지. 하지만 누구나 일생에 한 번은 무지개처럼 찬란한iridescent 사람을 만나는 법이야. 그런 사람은 아무와도 비교할 수가 없단다.” 앞에 나열된 평범한 사람, 잘난 사람, 제법 그럴싸한 사람은 결국 썸에 그치는 사람이다. 하지만 진짜배기는 무지개처럼 찬란해서 홀딱 반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말대로 브라이스와 줄리 둘은 서로에게 ‘무지개처럼 찬란한 사람’인 것으로 해피엔딩이다. 사랑은 이런 것이다. 예뻐서, 돈이 많아서, 조건이 좋아서가 아니다.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라서 신비롭게 빛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만난다면 홀딱 반해서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저 만나다 보니 적당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건……‘그냥 그런 사이’라는 뜻이다. 사랑의 감수성이 있다면 용납할 수 없는 관계다.
얼마 전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는 고등학교 학생들이 대거 출연했지만 학교 선생님의 모습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선생님 대신 입시 코디네이터라는 존재가 등장한다. 주인공 예서의 일상을 지배하는 이는 입시 코디네이터다. 예서는 대입성공을 위해 코디네이터에게 수십억의 비용을 치른다. 서울대 의대합격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면서 입시 코디네이터는 상황에 따라 예서의 친구도 되었다가, 부모도 되었다가, 선생님도 되었다가 한다. 때로 부모는 그 입시 코디네이터에 의해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기도 한다. 그런 상황이 과연 행복한 것일까. 비록 전교 1등이라는 결과를 얻어내지만 예서라는 아이의 학창시절이 나의 학창시절보다 행복한 것이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훗날 그녀의 기억에 남는 고등학교는 그저 내신점수를 만들었던 곳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결과를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쳐 간 곳 말이다. 인간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에서 풍요로워진다. 학교란 그런 곳이다. 사춘기의 그 찬란한 과정을 보내야 하는 공간이 단편적인 입시만 준비하는 곳이 된다면 너무 슬플 것 같다. 학창시절 선생님들을 그리워하는 내 이야기가 너무 지난 이야기, 전설 같은 이야기로 보이는 것은 아닌지 또 걱정스럽다.
한 달 넘게 스페인 북부의 길을 걸었다. 철저히 혼자였다. 낯선 외국에서 혼자라는 것이 어떤 느낌인가 하면, 그곳이 도시면 도시라서, 황량한 들판이면 들판이라서 외로움이 증폭되었다. 가장 당혹스러웠던 첫날밤의 이야기는 나의 산티아고 순례기인『그 길 끝을 기억해』에도 실려 있다. 출발지였던 생장피에드포르Saint jean pied de port에서 나는 더럽고 시끄러운 방을 못 견디고 나와 숙소의 식탁에 엎드려 잤다. 낯선 이방인들에 대한 경계심이 극에 달했던 것이다. 그 눅눅하고 퀴퀴한 공기를 함께 호흡하는 것도 정말 싫었다. 그런데 아침식사 시간에 마주한 그들은 뜻밖에 선량하고 순박했다. 그런 이미지의 전환은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일어났다. ‘정말 무례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별 생각이 없는’평범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도 나오듯 간사함이나 사악함보다는 오해와 태만이 이 세상에서 더 많은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 산티아고 순례길이 놀라웠던 것은 일상에서라면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 깨달을 수 있는 것을 아주 짧은 기간 안에 체험하고 느끼게 했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 대한 황종연 평론가의 평은 이렇다. 그녀의 일련의 행동들은 예외없이 사람의 선의와 사람 사이의 유대를 천진하게 믿는다는 특징을 띤다고. 하지만 ‘천진함’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다 큰 성인이 ‘천진함’을 휘두르고 다닌다는 것은 기필코 누군가에게는 폐를 끼치고 말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스스로 삼가고 성찰해야 할 것들을 ‘천진함’으로 퉁치는 것이다. 이들에게 ‘악의’는 없다. 김밥을 싸오고, 정리를 해주고, 사과를 하는 것에서 어떤 악의를 찾을 수 있겠는가. 결국 그런 악의 없는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만 스스로 야박하고 냉정해지는 것 같아 씁쓸해진다. 이런 사람은 악의는 없지만 관계에 서툰 사람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한때 저렇게 서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저렇지 않다고 손사래를 쳐봐도 내가 저런 모습에서 멀어지기까지 수많은 사건과 상처들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겉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사람도 어떤 부분에서는 뜻밖에 서툰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오셀로는 딱히 이아고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 그 점이 무서운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는 오셀로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그는 그저 오셀로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불편했고 자신의 역량을 한 가정을 무너뜨리는 일에 쏟았다. 우리의 현실에도 이런 사람은 없지 않다. 앞에서 언급했던 에너지 뱀파이어는 그저 에너지를 빼앗아갈 뿐이지만 이아고적인 인물들은 적극적으로 나의 삶을 파괴시킨다는 점에서 더 무섭다. 그러고 보면 교묘한 방법으로 의붓자식을 학대하여 끝내 죽여 버린 계모도 있었고, 결혼 후 행복하게 사는 친구가 부러워 친구와 그녀의 아기를 죽여버린 여자도 있었다. 이렇게 죽음으로까지 몰아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아고처럼 우리의 평온한 삶을 파괴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 우리 주변에 전혀 없다고는 누구도 장담
할 수 없다. 이아고 같은 이들은 겉보기에는 차분하고 이성적이고 배려하는 사람처럼 여겨진다.하지만 그들의 가치관은 뿌리 깊게 부정적이어서 타인의 행복은 물론 자신의 행복조차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같이 망하고 같이 죽겠다는 심보라고나 할까. 그들은 때로 세상일에 무심해하는 전략을 취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속내는 세상에 대해 결코 무심하지 않다. 이는 곧 언제까지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그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프랑스인인 남편과 나는 서로 배려하고 서로에게 좋은 가족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가족끼리 뭐 어때? 가족인데 뭘 따져? 그런 말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무책임한지 알기에 우리는 배려와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남편과 내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주고받는 말, ‘싸바(Ca va? 괜찮아?)’에는 참 많은 것이 담겨 있다. 관심과 애정과 배려의 의지……. 서로가 서로에게 무례하고 지겨운 관계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노력하고 또 노력한다. 내가 남편을 부르면 그는 어차피 고양이의 사소한 재롱 때문임을 알아도 달려온다. 나 역시 남편이 나를 부르면 그것이 휴대전화의 스팸이나 광고문자 내용을 물어보는 것 때문임을 확신해도 일단 달려간다. 날 때부터 주어진 가족과 성인이 되어 내가 선택해 만난 가족은 다르다. 주어진 쪽이 힘들었을수록 새 가족을 선택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선택 이후다. 나름의 노력이 더해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저절로 가족으로 살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중 『침묵』이라는 작품이 있다. 주인공 오사와는 학창시절 자신에 대해 나쁜 소문(컨닝, 폭행)을 퍼뜨린 라이벌 때문에 반 친구들 모두로부터 왕따를 당하게 된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피하기만 한다. 당연히 오사와는 그 일을 주동한 라이벌에 대한 증오로 불타오르고 모두에게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오사와는 우연히 지하철에서 라이벌 친구와 마주친 후 이런 사실을 깨닫는다. 어떤 종류의 ‘인간’에게는 깊이라는 것이 결여되어 있어서 고작 타인을 괴롭히고 모함하는 일에서 승리감과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는 것을. 얼마나 한심하면, 얼마나 얄팍하면 고작 이런 일에 행복해한다는 말인가. 세상에는 의미와 깊이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 깨달음 이후 오사와는 남은 학기를 굳건히, 홀로 견디어낼 수 있었다. 자신은 그런 얄팍한 인간들과 다르다는 자부심으로 말이다. 누군가 당신을 왕따시킨다면 그저 이렇게 생각해보라. 겨우 이정도 일에 기뻐하는 인간들에게 질 수는 없다고. 그리고 내 인내심은 저들의 비겁함보다 훨씬 강하다고.
그때까지 나는 부부간의 애정이라는 것에 대한 불신이 깊었다. 나는 하랄드와 에리카가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손님이 와 있으니까 노력하는 것이겠지’ 정도로 폄하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다 큰 성인 남자가 아무도 모르게 작은 교회에 와서 간절히 기도할 정도의 단단한 애정이 그들의 가정을 떠받치고 있었다. 행복한 가정의 실제 모델을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은 내 인생에 아주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독일에서 돌아온 후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바라는 가정의 모습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루었다.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 에리카가 내게 강력히 추천해주었던 고양이 2마리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들은 이후 서울의 우리 집으로 답방을 왔었고 올해 두 번째 방문이 예정되어 있다. 그들은 나와 내 남편과의 우정을 오래 지켜갈 각오를 한 것 같다.
정이현의 『삼풍백화점』이라는 단편소설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주인공이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여고동창의 R 집을 방문한 뒤의 상황이다. 물어봤으면 대답해주었겠지만, R에게 왜 혼자 사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내 기준에서는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끝끝내 숨길 작정이었다면 R은 혼자 사는 집에 주인공을 초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한 명쯤은 자신의 기막힌 사연을 들어주길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물어보지 않고, 들어주지 않은 것은 내 기준에서는 못내 아쉬운 일이다. 사람은 이따금 누구에게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은 마음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속 시원한 치유법이 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나도 원래는 사람과 쉽게 친해지지 못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책을 보면서 인간관계에 대해 연구하곤 했다. 그런 과정에서 인간은 서로 다른 점이 많은 것 같지만 그 다른 점을 초월하는 공통점도 많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런 노력의 결실인지 요즘은 차라리 처음 보는 사람과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이끌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르는 사람, 처음 보는 사람일수록 궁금한 것, 물어볼 것, 알아갈 것도 많지 않을까. 10분 정도면 서로 편안해지기 충분한 시간이다.
사랑받을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랑을 주는 것도 힘들다.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인지 모르는 것이다. 우리 엄마는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에게서 풍족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 받아본 사랑이 없으니 줄 수도 없는 것이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엄마가 이따금 꺼내놓는 이야기에서 엄마가 어떤 상황에서 성장했는지 유추해낼 수 있었다. 엄마는 자존심 때문에 그 사실조차 인정하기 싫어했다. 그럼 뒤늦게라도 사랑을 충분히 받으면 그 공허함이 채워지는 것일까. 그것은 상황에 따라 다른 것 같다. 자신이 사랑의 효용에 대해 인정하고 그 가치를 추구하고 싶어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나는 그랬다. 변화가 온다. 세상에는 누구에게나 기꺼이 사랑을 주고자 하는 존재들이 있다. 그런 사랑을 열심히 받아들이며 자아를 키워나가면 된다. 10년, 20년이 걸릴 수 있어도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런 착각과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베풀었으면 반드시 그만큼 돌려받을 것도 생각해야 한다. 남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란 없다. 아무리 어려운 처지라고 해도 ‘지혜’ 한 조각, ‘위로’ 한마디 정도는 건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대가 웃는 얼굴이나 감사하다는 표현까지 아끼는 사람이라면 내가 베푸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쑥스러워서 감사하다는 말을 못하는 거야’라고까지 이해해주고 있다면 이건 병이다. 앞서 언급한 소설의 민폐남 기기는 그날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부담을 찰리에게 던져놓고도 자신은 소방서에 연락해 구조를 받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갔다. 독일의 작가 하노 벡의 저서 『삶이라는 동물원』에 의하면 동물들조차 일방통행의 도움은 베풀지 않는다고 한다. 먹이를 구해온 녀석이 먹이를 나누어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협조의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하물며 우리는 사람이 아닌가.
얼마 전 영화 <그린 북Green Book>을 남편과 같이 집에서 보았다. 1960년대 미국, 아직도 흑인들의 인권이 백인과 동등하지 못했던 시절, 백인 운전사 토니와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 박사가 남부 지방을 함께 순회하면서 일어난 일들을 그린 영화였다. 영화에서 돈 셜리 박사는 천재 피아니스트로 이곳저곳에서 초빙을 받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무시를 당한다. 그 옆에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력을 저지른 토니에게 돈 셜리 박사는 자신이 어떻게 그날까지 살아왔는지, 어이없던 나날들을 견디어 왔는지 이야기한다. “The dignity always prevail.” 품위가 언제나 이긴다는 것이다. 아무리 부당한 대우라도 묵묵히 견디어낸 돈 셜리 박사의 품위는 결국 전체 흑인에 대한 이미지까지 바꿔낸다. 영화가 끝난 후 남편과 나는 동시에 ‘dignity’라는 단어를 읊조렸다. 가면이 품위를 지켜낼 수만 있다면 그것은 옳은 선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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