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하지만 불경기라고 해서 무조건 소비가 위축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명품 시장은 성장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또한 단지 소득 격차가 커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소위 ‘작은 사치(small luxury)’를 위한 상품, 새로운 수요를 창출한 상품, 구매의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상품 등은 불황기에도 견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경기라고 하더라도 소비 시장을 획일적인 시각이 아니라 소비자 세그먼트(segment)별로 세밀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파악한다면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다. 전술했듯이 2023년이 불경기라고 하지만, 지난 몇 년 사이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엄청난 기술의 진보를 이뤘고, 앱·가상·비대면 경제가 크게 발달했다. 무엇보다 MZ라고 불리는 주된 소비층의 세대 교체가 이뤄지고 있다. 결국 핵심은 이러한 추세적 변화가 경기 침체라는 주기적 변화와 만나 어떠한 트렌드를 만들어낼 것인가를 추론하는 일이다.
“지난 30년간 우리가 경험해왔던 세계화는 끝났다.” 세계 최대 자산 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Larry Fink) 회장이 2022년 3월, 주주들에게 보낸 서한에 담은 메시지다. 1990년대 이후 진행된 세계화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경제를 지탱하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시작으로 우리는 ‘세계화 시대의 종언’을 목도하고 있다. 세계화의 종식은 곧 국가 간의 분열을 의미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단순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이 아니다. 이들의 대립은 곧 미국·유럽·일본·한국 등을 포함한 자유주의 진영과 러시아·중국·북한으로 구성된 사회주의 진영의 대립으로 이어져 ‘신냉전 시대’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서방의 대(對)러시아 제재와 이에 대한 러시아의 반발로 초래된 에너지 전쟁 및 식량 위기도 가열되고 있다. 대만과 중국의 갈등, 미국과 중국 간 대립 등 그간 하나의 공동체를 지향하던 세계는 자원·외교·안보를 중심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무엇이 삶을 의미 있게 하는가?” 미국 여론조사 업체 퓨리서치센터가 17개국 성인에게 물었다. 14개국 국민은 ‘가족’을 꼽은 반면, 유일하게 한국 국민은 ‘물질적 풍요(material well-being)’를 꼽았다. 여기서 물질적 풍요란 충분한 수입, 빚이 없는 상태, 음식과 집 등을 의미하는데, 다른 나라에서 상위권에 오른 ‘직업’이나 ‘친구’, ‘취미’는 순위 내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개인의 삶만이 아니다. 이제까지 평균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무난한 상품, 보통의 의견, 정상의 기준이 흔들리고 있다. 더없이 독특한 상품들이 선택받고, 극렬히 찬성하거나 극렬히 반대하는 의견으로 쪼개진다.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됐던 것이 ‘틀림’이 아니라 ‘다름’으로 규정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성의 가치가 제각각 인정받으면서 평균적인 생각은 점차 설 자리를 잃고 있다.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는 이처럼 시장이나 사회에서는 물론이고 개개인의 삶과 가치관에서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지던 ‘전형성’이 사라지는 현상을 가리켜 ‘평균 실종’ 트렌드라 명명하고자 한다.
글로벌 연결성이 강화됨에 따라 단극화 현상은 ‘○○ 광풍’의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보가 실시간으로, 또 광범위하게 전파되면서 유행의 세기와 속도가 더 강해지고 빨라지는 것이다. 영화 개봉을 예로 들어보자. 과거에는 개봉일에 국가 간 시차가 있어 외국에서의 흥행 성적이 해당 작품의 관심을 모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OTT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에서 동시에 개봉되고 전세계 콘텐츠 순위가 집계되어 매일 톱 10이 발표된다. 세계인이 선택한 콘텐츠라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한 번쯤 보고 싶게 만드는 강력한 인력으로 작용하며, 인기 순위가 ‘전국구’에서 ‘세계구’로 빠르고 강력하게 동기화되고 있는 것이다.
오피스 탈출의 분위기를 타고 구인·구직 플랫폼 시장은 호황을 맞았다. 직장을 다니면서 퇴사를 준비하는, 이른바 퇴준생들을 겨냥한 비대면 서비스 또한 증가하고 있다. 직장인 커리어 플랫폼 리멤버는 경력직 구인·구직 서비스 ‘리멤버 커리어’를 운영 중이고, 잡플래닛 등 취업 플랫폼 기업들도 경력 사항을 입력해두면 수시로 이직 제안을 받을 수 있는 스카우팅 서비스를 제공한다. IT 업계에서는 인재를 추천한 내부 직원에게 보상금을 제공하기도 한다. 회사를 오래 다닐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승진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현대자동차그룹에서는 과장(책임)이 되기를 거부하는 대리들을 일명 ‘진거자(진급거부자의 준말)’라고 부른다고 한다.
경기 침체에 따른 소비자들의 대처라는 시각에서 보면 체리슈머의 등장을 일시적인 변화로 바라볼 수도 있다. 하지만 1인 가구가 증가하는 추세에서 생겨난 현명한 소비 관리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경기가 좋아져도 계속 발전해나갈 추세적 변화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다면 기업은 체리슈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체리슈머를 불황 속에서 꼼수를 부리는 소수의 특이한 소비자로만 바라봤다면, 이제 그 생각을 바꿔야 한다. 공짜만 바라는 블랙컨슈머로 오인하거나 싸게 사기에 급급한 체리피커 소비자라고 간과해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퍼주기식 할인도 해답은 아니다. 작고 유연한 소비를 원하는 체리슈머들이 증가함에 따라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똑똑한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요즘은 ‘친하다’의 의미를 정의 내리기가 간단하지 않다.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실시한 Z세대 관계분석 워크숍에서 Z세대는 ‘줌을 켜놓고 각자 공부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관계’, ‘SNS에서 자주 소통하는 관계’를 ‘1년에 한두 번씩 오프라인으로 만나는 관계’보다 더 친한 관계로 분류했다. 더 이상 오프라인 만남이 온라인 만남에 우선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사람들이 상대방과의 친소를 결정하는 기준이 과거보다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열광할 수 있는 새로운 상품을 내놓기 위해서는 창의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의도적으로 궤도를 이탈하여 최대한 이질적인 것과 부딪히며 집요하리만큼 파고들고, 전복적 사고로 무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기술과 브랜드와 상품을 재정의함으로써 소비자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즐거움을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소비자지향적 관점에서 출발하지 못한다면 창의적 사고조차도 결국 시장에서 성공하기 어렵다. 기술력은 앞섰지만 시장의 표준을 만들지 못했던 소니의 ‘베타맥스’ 비디오나, 소비자가 특수안경 착용을 불편해해서 엄청난 마케팅을 퍼붓고도 살아남지 못한 3D TV 등이 대표적인 예다.
오늘날의 알파세대에게는 더 이상 전교 1등이나 엄친아 개념이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호감으로 느끼는 경향이 있다. 달리기를 잘하든 배드민턴을 잘 치든, 자신의 영역에서 하나만 잘해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알파세대는 사람은 저마다 지니고 있는 기질과 능력이 다르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공부를 좀 못한다고 체념하기보다는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특정한 분야에서 수준이 높은 개개인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자기중심성이 강한 탓에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라고 믿는 세대다. 그래서 “모두가 셀럽”이라고 여긴다.
한국 사회에서 나이보다 젊게, 아니 어리게 사는 것이 하나의 미덕이 되고 있다. “멋져 보인다”보다 “어려 보인다”가 더 큰 찬사로 여겨진다. 아동 취향의 물건을 모으며 기뻐하는 소비자들을 ‘키덜트’라고 부르는데, 그동안 이들은 주류에서 벗어나 조용히 혼자서 자신의 취미를 즐기는 소수 마니아 집단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런 취향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그렇게 안 봤는데, 대단하다”는 식의 감탄으로 변하고 있다. 이제 어른이들은 “어른이란 이러해야 한다”는 테두리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대로 행복을 추구해나간다.
평균이 사라지고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어떤 현상에 대해 '보통, 일반적으로, 대개. 평균적으로 OOO하다'고 말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 양태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기억에 남는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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