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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 김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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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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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품격을 구성하는 퍼포먼스 VS 존엄을 구성하는 퍼포먼스
사람은 누구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일정 정도 연기를 한다. 무대 위의 배우처럼 자신에게 요구되는 배역을 수행하며, 그런 자신을 통제하고 조율한다. 이런 능력을 성찰성이라고 한다. 성찰성이 고도로 발달하면 관계에서 노련함을 갖추게 된다. “아이고, 가엾어라. 어쩌다 몸이 그렇게 됐니?”라는 물음에 “장애인 할인을 받기 위해서죠!”라고 위트 있게 받아치거나, 장애인 자녀를 위한 특수학교 설립에 동의해달라며 무릎을 꿇은 부모들에게 “쇼하지 마!”라고 소리치며 똑같이 무릎을 꿇는 식의 노련함. 이런 노련함은 자아를 보호하지만,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하게 하는 문제를 낳기도 한다. 뜻밖에도 저자는 삶의 이런 연극적인 면에서 인간 존엄의 근거를 발견한다. 우리가 인권 규범이나 법률에 기대지 않고 구체적인 일상에서 모든 인간이 존엄한 이유를 찾는다면, 바로 이런 일상의 공연들이 그 발견의 장소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단, 권력자를 위한 의전이나 장애인을 동원하는 정치 행사 등 ‘품격을 구성하는 퍼포먼스’가 아닌 ‘존엄을 구성하는 퍼포먼스’가 여기 해당된다.

존엄을 구성하는 퍼포먼스에서는 그에 참여하는 모든 행위자가 실재(진실)를 공유한다. 그 공유하는 실재 위에서 서로가 서로의 연기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면서 대등하게 퍼포먼스에 참여한다. 아이를 갖고 싶어 하지만 아이가 없는 대학 동기 앞에서 육아가 화제가 되었을 때 신속하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리는 친구, 시한부 선고를 받은 가족 앞에서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며 저녁식사를 하는 가족들, 카페 옆자리에서 시끄럽게 소음을 내는 자폐 아동에게 무관심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책으로 눈길을 돌리는 대학생. 이들은 모두 서로의 연기가 품고 있는 의도를 공유한다. (중략)
서로를 인격체로 존중하는 상호작용은 실재를 공유하면서 그 존중을 강화한다. 모르는 척해주는 익명의 대학생이 고마워서 그를 존중하며, 자신을 존중하려 애쓰는 자폐아 부모의 노력을 아는 대학생은 더더욱 무심한 척 책으로 눈길을 돌린다. 타인이 나의 반응에 다시 반응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게 되며, 나를 존중하는 타인을 통해 나 자신을 다시 존중하게 된다.

“우리는 사랑과 정의를 부정한다”
_ 모든 연극을 거두고, 무력한 자신을 선언하는 힘
저자는 ‘품격을 위한 퍼포먼스’에 동원되지 않기 위해 노련해지려 애쓰던 자신을 고백한다. 내 다리는 조금이라도 길어 보이는가? 나는 빈곤하고 우울한 장애인 같은가? 단 한순간도 성찰의 시각을 거두기 어려웠던 그는 어느 날 이 모든 연극적인 노력을 부정하는 문장들을 만났다. 1960년대 일본에서 등장한 뇌성마비 장애인들의 단체 ‘푸른잔디회’의 행동 강령이었다.

1. 우리는 우리가 뇌성마비자라는 것을 자각한다.
2. 우리는 강렬한 자기주장을 행한다.
3. 우리는 사랑과 정의를 부정한다.
4. 우리는 문제 해결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5. 우리는 비장애인 문명을 부정한다.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 자신의 가능성과 실천 능력까지 부정하는 이 순수한 부정의 문장들 앞에서 저자는 품격주의자들의 연극에 대응하기 위해 또 다른 연극을 펼쳤던 자신을 돌아본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한 번은 이렇게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무력한 자신을 선언해야 하지 않을까?

능청스럽고, 유머러스하고, 지적이고, 신체적 결함을 보완하는 정신적 매력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는 압박. 사무실의 생수통을 갈지 못하는 대신 인사성 바르고 동료들의 생일이라도 잘 챙겨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심적 부담감. 이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일이다. (중략)
역설적인 타인 지향적 연극을 극복하는 힘. 때로 무력하고 별 볼 일 없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힘.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가진 것이 없다는 부정을 선언하는 힘. 거기서 우리는 타인 지향성을 넘어선 진정성의 한 형태를 본다. (중략)
타자의 시선으로 나를 보는 것을 완전히 부정하고 오로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나의 몸, 운명, 삶, 실존에 대한 수용을 전제로 한다.

기억에 남는 문구

부모는 우리 자신의 은유이다.
부모의 사랑과 관심, 인정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돌보고, 아끼고,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