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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화가의 출세작 - 이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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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출세작

이유리

밀레, 뭉크, 쇠라… 이제는 누구나 알지만 그때는 아무도 몰랐던, 거장의 탄생을 알린 그림들이 있다. 이름 없는 예술가에게 단번에 눈부신 명성과 화려한 성공을 안겨 준 이 ‘결정적 그림’은 어떻게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 탄생한 그림 속에서 삶의 매서운 진실을 발견해 낸 <화가의 마지막 그림>의 저자 이유리가, 이번에는 예술사에 한 획을 그은 거장들의 생기 넘치는 출발점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알폰스 무하에서 전혁림까지, 불확실한 삶의 바다에서 표류하던 18인의 예술가가 한 조각 돛단배를 띄우는 심정으로 내놓은 그림들. 그 떨리는 첫걸음에 담겨 있는 순수한 열망과 위대한 꿈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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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이 밀레에게 꼭 나쁜 영향을 끼친 것만은 아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거대한 스캔들을 뿌리며 그에게 진정한 명성을 안겨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밀레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세간의 해석이 영 마뜩찮았다. 그는 ‘불온한 농민 봉기의 화가’가 되기도 싫었고 ‘위대한 혁명가’도 되기 싫었다. … 사실 밀레가 당황스러워한 것은 당연했다. 사람들의 인식과는 달리 그는 공화주의자이기는커녕 보수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유명한 화가들의 일생은 보통 과장되거나 왜곡되기 일쑤지만, 이 부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가 바로 밀레일 것이다. … 밀레는 그렇게나 많은 농부들을 화폭에 담으면서도, 농부들과는 개인적인 접촉을 삼갔다. 그의 작품 중 초상화를 살펴봐도 귀족들의 초상화는 다수 남아 있는 반면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있는 농부들을 그린 초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즉,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농부는 익명의 농부로, 밀레가 특별히 친밀감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듯 밀레는 자신의 작품에서 더욱 독창적인 세계를 창출해 내기 위해 농부들과 그들의 삶을 조망하긴 했지만, 정치적인 뜻을 그림에 담은 적은 없었다. 혁명 정신을 지닌 인물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오해는 계속되었다. 그럴수록 밀레는 출세의 길에 한 걸음씩 다가가게 되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할 뿐이었다.

최근 오키프는 폴리처에게 매주 편지를 보내며 ‘예술가로 이름을 알릴 만한 작품을 그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토로했다. 폴리처는 친구의 딱한 사정에, 자신의 일인 양 마음이 타들어 갔다. 그러던 중 오키프가 폴리처에게 소묘 몇 점을 보내왔다. “너무 개인적인 것을 표현한 그림이라 보고 있으면 괴로워서 곁에 두고 싶지 않다”는 편지와 함께였다. … 비록 오키프는 그녀에게 이 그림을 아무에게도 보여 주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그러기엔 작품이 너무나 반짝반짝했다. 당장 이 소묘의 진가를 알아봐줄 누군가에게 보여 줘야 했다. 그 순간 폴리처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바로, 뉴욕에서 가장 모험적이고 영향력이 막강한 ‘갤러리 291’의 소유주이자, 아방가르드 미술과 사진을 특화한 잡지 〈카메라 워크〉의 발행인 그리고 그 자신이 너무나 뛰어난 사진작가인 앨프리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1864~1946)였다.
새해가 밝자 폴리처는 당장 뉴욕 5번가를 가로질러 스티글리츠가 있는 갤러리 291로 향했다. 늘 신진 예술가를 찾고 있던 스티글리츠는 엉망이 된 머리와 구깃구깃한 옷차림으로 비실비실 걸어와 폴리처를 맞이했다. 미심쩍은 표정으로 폴리처가 건네준 소묘 뭉치의 포장을 풀어 본 순간 스티글리츠의 눈이 번뜩였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유기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의 ‘목탄 추상화’들이었다.

‘국전’이라는 제도권 미술과의 절연은 재야작가의 길로 가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결국 전혁림은 62세 때인 1977년 ‘작품도 정리하고, 인생을 정리하려고’ 부산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통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세간의 평가와 상관없이 자기 예술을 위한 외길을 묵묵히 걸었다. 오히려 중앙화단과 연을 끊자, 국제무대에서 새로 부각된 양식을 흡수하는 데 급급하거나 유행에 따르는 기류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에 천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전혁림은 평생 통영 주변을 맴돌며 통영의 바다를 ‘코발트블루’ 화폭에 담으며 살았다. 시인 정수자가 전혁림의 그림을 보고 ‘통영이 시푸르게 걸어 나오는 듯하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전혁림으로 말미암아 통영과 코발트블루는 거의 동의어가 되었다.
그런 와중에, 1979년 여름이 되었다. 그는 순식간에 ‘과소평가 받는 작가’가 되어 단번에 화단의 화제 인물로 떠올랐다. 환갑이 훨씬 지난 노화가의 진짜 전성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가치가 재조명된 것에 대한 보답인지 몰라도, 동년배 작가들이 ‘회고전’을 열거나 화업에서 손을 떼던 때에도 그는 ‘현역작가’로서 끝없이 창작력과 열정을 불태웠다. 자타 공인 ‘통영의 활화산’. 그가 바로 전혁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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