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온도
이기주
언어에는 나름의 온도가 있다고 생각하는 저자가 일상에서 발견한 의미 있는 말과 글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저자는 단어의 어원과 유래, 그런 언어가 지닌 차가움과 따뜻함을 글감 삼아, 하찮아 보이는 것들의 소중함을 예찬한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문장과 문장에 호흡을 불어넣으며 뜨거운 음식을 먹듯 찬찬히 곱씹어 읽다 보면, 독자 스스로 각자의 '언어 온도'를 되짚어볼 수 있을지 모른다.
책속에서
어제 노트북을 켜고 ‘사람’을 입력하려다 실수로 ‘삶’을 쳤다. 그러고 보니 ‘사람’에서 슬며시 받침을 바꾸면 ‘사랑’이 되고 ‘사람’에서 은밀하게 모음을 빼면 ‘삶’이 된다. 몇몇 언어학자는 사람, 사랑, 삶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본류(本流)를 만나게 된다고 주장한다. 세 단어 모두 하나의 어원에서 파생했다는 것이다.
- '사랑이란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중에서
세 단어가 닮아서일까. 사랑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사랑이 끼어들지 않는 삶도 없는 듯하다.
2호선 홍대입구역에서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있는 할머니와 손자가 눈에 들어왔는데 자세히 보니 꼬마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할머니 손에는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병원에 다녀오는 듯했다. 할머니가 손자 이마에 손을 올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 ‘더 아픈 사람’ 중에서
“아직 열이 있네. 저녁 먹고 약 먹자.”
손자는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대꾸했다.
“네, 그럴게요. 그런데 할머니. 할머니는 내가 아픈 걸 어떻게 그리 잘 알아요?”
순간, 난 할머니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대답의 유형을 몇 가지 예상해 보았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라거나 “할머니는 다 알지” 같은 식으로 말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니었다. 내 어설픈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다. 할머니는 손자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게 말이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안주가 떨어질 무렵,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주제가 옮겨갔다. 잡지사에서 에디터로 일하는 친구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 불온한 상상을 하게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 ‘여전히 당신을 염려하오’ 중에서
“누군가를 좋아하면 상대의 ‘낮’은 물론이고 상대의 ‘밤’도 갖은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법이지. 때론 서로의 감정을 믿고 서로의 밤을 훔치는 확신범이 되려 하지. 암, 그게 사랑일 테지.”
철학 서적을 주로 기획하고 출간하는 출판사 사장은 이런 이야기를 보탰다.
“흔히 말하는 ‘썸’이란 것은, 좋아하는 감정이 있다는 ‘확신’과 ‘의심’ 사이의 투쟁이야. 확신과 의심이 밀물과 썰물처럼 교차하는 법이지. 그러다 의심의 농도가 점차 옅어져 확신만 남으면 비로소 사랑이 시작되는 게 아닐까?”
사과를 뜻하는 단어 ‘apology’는 ‘그릇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말’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그리스어 ‘apologia’에서 유래했다. 얽힌 일을 처리하려는 의지와 용기를 지닌 자만
- '진짜 사과는 아프다' 중에서
이 구사할 수 있는 승리의 언어가 사과인 셈이다. 사과의 한자를 살펴보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 사과의 사(謝)에는 본래 ‘면하다’ 혹은 ‘끝내다’라는 의미가 있다. 과(過)는 지난 과오다. 지난 일을 끝내고 사태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는 행위가 바로 사과인 것이다.
언젠가 정중히 사과를 건네는 사람의 표정을 들여다본 적 있다. 그는 어딘지 힘겨워 보였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왜일까. 엉뚱한 얘기지만 영어 단어 ‘sorry’의 어원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안함을 의미하는 ‘sorry’는 ‘아픈’ ‘상처’라는 뜻을 지닌 ‘sore’에서 유래했다. 그래서일까. 진심 어린 사과에는 ‘널 아프게 해서 나도 아파’라는 뉘앙스가 스며 있는 듯하다. 진짜 사과는, 아픈 것이다.
동사 알다(知)가 명사 알(卵)에서 파생했다고 한다. ‘아는 행위’는 사물과 현상의 외피뿐만 아니라 내부까지 진득하게 헤아리는 걸 의미한다.
- ‘헤아림 위에 피는 위로라는 꽃’ 중에서
이를 사람에 대입해 봤으면 한다. 우린 늘 누군가를 안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한두 번 대화를 나누거나 우연히 겸상한 뒤 “그 친구 말이야” “내가 좀 알지”라는 식으로 쉽게 내뱉는다.
하지만 제한된 정보로는 그 사람의 진면목은 물론 바닥도 알 수 없는 법이다. 상대의 웃음 뒤 감춰진 상처를 감지할 때,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뿐 아니라 싫어하는 것까지 헤아릴 때 “그 사람을 좀 잘 안다”고 겨우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위로는, 헤아림이라는 땅 위에 피는 꽃이다.
상대에 대한 ‘앎’이 빠져 있는 위로는 되레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상대의 감정을 찬찬히 느낀 다음, 슬픔을 달래 줄 따뜻한 말을 조금 느린 박자로 꺼내도 늦지 않을 거라고 본다.
글은 여백 위에만 남겨지는 게 아니다. 머리와 가슴에도 새겨진다. 마음 깊숙이 꽂힌 글귀는 지지 않는 꽃이다. 우린 그 꽃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는다. 때론 단출한 문장 한 줄이 상처를 보듬고 삶의 허기를 달래기도 한다.
- '긁다, 글, 그리움' 중에서
책 쓰기는 문장을 정제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른 아침 머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 깊은 밤 방 안에 홀로 있을 때 느낀 상념, 점심을 먹고 커피를 들이켜며 중얼거린 말에서 가치 없는 표현을 걸러낸 다음 중요한 고갱이를 문장으로 옮기고, 다시 발효와 숙성을 거쳐 조심스레 종이 위에 활자로 펼쳐놓는 일이 글쓰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 ‘글 앞에서 쩔쩔맬 때면 나는’ 중에서
촘촘한 체를 쳐서 찌꺼기를 걸러내듯 문장의 불순물을 추려내는 작업이 유독 잘 되는 날이 가끔 있다. 그런 날이면 몸을 가득 채운 문장이 가슴의 둑을 터트려 홍수가 날 것만 같아서 머리에 맴도는 단어를 마구 쏟아내야 한다.
이누이트(에스키모)들은 분노를 현명하게 다스린다. 아니, 놓아준다. 그들은 화가 치밀어 오르면 하던 일을 멈추고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언제까지? 분노의 감정이 스르륵 가라앉을 때까지.
- '분노를 대하는 방법' 중에서
그리고 충분히 멀리 왔다 싶으면 그 자리에 긴 막대기 하나를 꽂아두고 온다. 미움, 원망, 서러움으로 얽히고설킨, 누군가에게 화상을 입힐지도 모르는 지나치게 뜨거운 감정을 그곳에 남겨두고 돌아오는 것이다.
감정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이모션(emotion)의 어원은 라틴어 모베레(movere)다. ‘움직인다’는 뜻이다. 감정은 멈추어 있지 않고 자세와 자리를 바꿔 가며 매 순간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말한다. 이별 또한 사랑의 전개 과정이라고. 사랑이 ‘기승전결’을 거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 '감정은 움직이는 거야' 중에서
배본 창고에 들어서면 나무 냄새가 물씬 풍긴다. 파블로프의 개가 종소리만 들어도 먹이 생각에 침을 흘리듯, 난 이곳에 오면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라는 시
- ‘지지향, 종이의 고향’ 중에서
집을 떠올리곤 한다. 출판사가 제작한 도서는 배본사가 관리하는 창고에 머물다 세상으로 나아간다. 모든 책이 독자의 부름을 받는 것은 아니다. 어떤 책은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곧장 서점으로 배송되지만 평생을 음습한 창고 구석에 갇혀 지내다 생을 마감하는 비운의 책도 많다.
파주출판도시에 지지향(紙之鄕, 종이의 고향)이라는 이름의 게스트하우스가 있는데, 나는 그 작명법을 그대로 적용해서 배본사에 서지향(書之鄕, 책의 고향)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제주도 곳곳에 솟아 있는 산은 산세가 가파르지 않고 유순하다. 거만하지가 않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인자한 어머니가 두 팔을 벌려 자식을 안아주는 모습이다. 모르긴 몰라도 저 산들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더 완만해질 것이 분명하다. 비바람과 풍화작용을 거치면서 더 부드러운 곡선이 될 것이다.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우리네 어머니들의 허리가, 자연스레 하늘보다 땅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 ‘제주도가 알려준 것들’ 중에서
사실 유머(humor)와 개그(gag)는 조금 결이 다른 개념이다. 개그는 상대방을 웃기기 위해 끼워 넣는 즉흥적인 대사나 우스개를 뜻한다. 웃기는 게 유일한 목적이다. 유머는 그렇지 않다. 익살과 해학과 삶의 희로애락이 적절히 뒤범벅된 익살스러운 농담을 의미한다. 유머 앞에서 우리가 왁자지껄 웃어젖히다가도 어느 순간 씁쓸한 눈물을 쏙 빼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 ‘지옥은 희망이 없는 곳’ 중에서
유머의 어원도 흥미롭다. 유머는 라틴어 우메레(umere)에서 유래했다. 물속에서 움직이는 유연한 성질을 지닌 물체를 지칭한다. 그래서일까. 적당한 유머는 삶의 경직성을 유연성으로 전환하고 획일성을 창의성으로 바꿔 놓기도 한다.
난 어머니의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체하며 콜록콜록 공연한 기침만 해댔다. 어떤 말은 일부러 못 들은 척해서 그냥 공중으로 날려버려야 한다. 굳이 민망하게 두 번 세 번 주고받으며 서로의 심경을 확인할 이유가 없다. 괜스레 마음만 더 아프다.
- ‘더 주지 못해 미안해’ 중에서
나는 어머니가 흘린 말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차디찬 빙판길에 ‘미안’이란 단어를 내동댕이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날 난 자동차 히터를 더 크게 트는 일밖에 하지 못하였다. 어머니의 “미안하다”는 말이 시끄러운 히터소리에 묻혀버리도록….
뭐든 자세히 보면 다른 게 보이는 것 같다. 강물만 해도 그렇다. 버스를 타고 달리다 새카만 한강을 한참 바라보면 알게 된다. 강 위를 떠다니는 게 물만은 아니라는 것을, 바람이 흐르고 있고, 햇살도 내려앉아 있다는 것을.
- ‘자세히 보면 다른 게 보여’ 중에서
‘달팽이의 별’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달팽이처럼 촉각에만 의지해 느린 걸음으로 세상을 사는 남편과 척추장애를 앓는 아내의 사랑 이야기다.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린 가장 귀한 것을 보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있습니다. 가장 값진 것을 듣기 위해 잠시 귀를 닫고 있습니다.”
한 번은 여행과 방황의 유사성에 대해 생각한 적도 있다. 둘 다 ‘떠나는 일’이란 점에서는 닮았다. 그러나 두 행위의 시작만 비슷할 뿐 마지막은 큰 차이가 있다.
- '여행의 목적' 중에서
여행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tour’는 ‘순회하다’ ‘돌다’라는 뜻의 라틴어 ‘tornus’에서 유래했다. 흐르는 것은 흘러 흘러 제자리로 돌아오는 속성을 지닌다. 여행길에 오른 사람은 언젠가는 여행의 출발지로 되돌아온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방황인지도 모른다.
하나의 계절이 가고 또 다른 계절이 다가올 때, 계절의 틈이 벌어질 때 사람들은 각자의 방편으로 소박한 행사를 치르곤 한다. 어떤 이는 장롱에 묵혀둔 옷을 꺼내 말끔히 손질하거나 새롭게 수선한다. 의식(衣食)으로 의식(儀式)을 거행하는 셈이다.
- ‘계절의 틈새’ 중에서
또 다른 이는 집 청소와 책상 정리로 마음에 묻은 얼룩을 닦아낸다.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을 분류하며 일상의 틈바구니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다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계절의 틈새를 건너가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과 시선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참으로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대를 자세히 응시하는 행위는 우리 삶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관찰 = 관심’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기도 한다.
- ‘관찰은 곧 관심’ 중에서
사람은 관심이 부족하면 상대를 쳐다보지 않는다. 궁금할 이유가 없으므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외면하는 것이다. “당신이 보고 싶지 않아요”라는 말은, “그쪽에 관심이 없어요” 혹은 “뜨겁던 마음이 어느 순간 시들해졌어요. 아니 차가워졌어요”라는 말과 동일하게 쓰이곤 한다.
그래서일까. 돌이켜보면 관심이 멈추던 순간, 상대를 향한 관찰도 멈췄던 것 같다.
기억에 남는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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