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Richard Flanagan)
2014년 맨부커상 수상작. 이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태국-미얀마 간 철도건설 현장에서 살아남은 전쟁포로이자 현재 화려한 전쟁영웅으로 부활한 외과의사 도리고의 기억과 현실을 중심으로 사랑과 죽음, 전쟁과 진실, 상실과 발견의 세계를 그린 장편소설. ‘죽음의 철도’라고 불리는 버마 철도는 이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고자 만든 길이 415km의 철도로, 군인과 전쟁물자 수송을 위해 건설됐다. 실제로 작가는 일본군 전쟁포로로서 미얀마 철도건설 노동자였던 아버지의 경험을 되살려 작품을 썼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차대전 당시 일본군의 타이-미얀마 간 ‘죽음의 철도’ 라인에서 살아남아 현재 잘나가는 의사이자 화려한 전쟁영웅이 된 외과의 도리고 에번스다. 기본 줄거리는 도리고 에번스가 젊은 날 전쟁터로 출정 전 우연히 만난 자신의 젊은 숙모와 나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기억과, 차후에 철도건설 현장의 일본군 전쟁포로로서 겪는 잔혹하고 비참한 현실이 주된 이야기 배경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괴로워하는 삶의 어둡고도 치열한 두 여정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작가가 묘사하는 전후 생존자들의 삶이다. 여기에는 일본군 밑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아등바등했던 조선인 인물 최상민도 있다. 목숨 때문에 일본군의 수족으로 평생을 살았으나 마지막에는 강자독식 위주로 굴러가는 전범재판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이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일본군 나카무라 소령과 고타 대령의 전후 행적은 또하나의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작가의 아버지는 실제로 일본군 전쟁포로로서 버마 철도 건설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아버지가 겪었던 참담하고 끔찍한 전쟁의 참상에 대한 기억은 작가와 형제들의 어린 시절을 사로잡은 역사의 트라우마였다.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체험을 듣고 자란 작가는 이 이야기를 쓰기 위해 12년간 집필에 매달리며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 다섯 개의 다른 판본을 썼다고 한다. 그의 치밀한 구상은 이 작품의 제목과 구성에서 먼저 역력히 드러난다.
책속에서
왜 태초에는 항상 빛이 있는 걸까? 도리고 에번스에게 최초의 기억은 어머니, 할머니와 함께 앉아 있던 교회 안으로 햇빛이 쏟아지던 모습이었다. 나무로 지은 교회. 눈부신 빛. 자신을 반기는 그 초월적인 빛 속을 아장아장 들락거리다가 여자들의 품에 안기던 자신. 그를 사랑하던 여자들. 바다에 들어갔다가 해변으로 돌아오는 것과 비슷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행복한 사람에게는 과거가 없고, 불행한 사람에게는 과거만 있다. 노인이 된 뒤 도리고 에번스는 이것이 어디서 읽은 말인지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낸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만들어냈다가, 이것저것 뒤섞었다가, 다시 부숴버렸나? 가차없이? 바위가 자갈이 되고, 자갈이 흙이 되고, 흙이 진흙이 되고, 진흙이 바위가 되는 식으로 세상은 굴러간다. 그가 세상이 왜 이러저러한 모습인지 설명해달라고 다그칠 때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 그대로다. 세상은 그냥 그런 거야. 원래 그래, 아들.
그는 이상한 데서 놀라움을 느꼈다. 돌로 지어진 그들의 집. 그들이 사용하는 식기의 무게.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한 무지. 자연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 그는 가족들을 사랑했지만, 자랑스러워하지는 않았다. 식구들이 가장 잘한 일은 살아남은 것이었다. 그것이 어떤 업적인지 그가 제대로 알아보기까지는 평생이 걸렸다.
몇 년 전부터 자신이 전쟁영웅이 된 것을 그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유명한 외과의였으며, 세월과 비극의 대중적인 상징이었고, 전기와 연극과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었다. 숭배의 대상, 위인전의 대상, 아첨의 대상이었다. 자신의 외모 중 일부, 그리고 습관과 과거사 중에 그 전쟁영웅과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가 아니었다.
어떡해.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을 정말 원해.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꼴사납게 보일 정도로 저 사람을 원해. 자신이 수치도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고, 마음속에 못된 생각이 들어찬 것 같고, 온 세상이 그녀에게 벌을 내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머릿속에 떠오르자마자 곧바로 다른 생각에 밀려났다. 수치심도 모르고 못된 내 심장이 온 세상 사람들보다 더 용감해. 순간적으로 자신이 맞서서 물리치지 못할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이것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임을 알면서도 그녀는 더욱더 들뜨고 용감해졌다.
에이미에게 사랑은 우주에 닿는 것, 한 사람 안에서 폭발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우주 안으로 폭발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파괴하는 멸절이었다.
라인은 비와 햇빛을 환영했다. 많은 사람들이 묻힌 묘지의 머리뼈와 넙다리뼈와 부러진 곡괭이 자루 사이에서 씨앗이 싹을 틔우고, 레일을 고정하는 대못과 빗장뼈 옆에서 나란히 덩굴손이 자라나서 티크 침목과 정강이뼈, 어깨뼈, 등뼈, 종아리뼈, 넓다리뼈 주위로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지진이 끝날 때가 가까워지면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 알아요? 사토가 물었다. 저물어가는 햇빛 속에서 그의 지친 얼굴이 점점 어둑해졌다. 그가 말을 이었다. 땅의 정신없는 흔들림이 멈추면, 모든 것이, 그러니까 벽에 걸린 그림, 거울, 창문, 고리에 걸어둔 열쇠 등 모든 것이 부르르 떨면서 이상한 소리를 냅니다. 밖에서는 당신이 친숙하게 알던 모든 것이 영원히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르고요.
그거야 당연하죠. 나카무라가 말했다.
마치 세상이 그 어렴풋한 소리를 내는 것 같죠?
맞습니다. 나카무라가 말했다.
해부실 천칭의 스테인리스 접시가 미국인의 심장 때문에 떨릴 때가 꼭 그랬습니다. 마치 세상이 떠는 것 같았어요.
기운이 다 빠져버린 공허가 그를 에워쌌다. 뚫을 수 없는 공허가 사교성 좋기로 유명한 이 남자를 감싸고 있었다. 그는 벌써 다른 세상에 가서 살고 있는 듯했다. 한없는 꿈 또는 끝나지 않는 악몽을 풀었다 되감기를 영원히 반복하면서. 꿈과 악몽 중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는 거기서 영원히 탈출할 수 없을 터였다. 그는 다시 불을 켤 수 없게 된 등대였다.
그는 사흘 동안 사경을 헤매며 평생 가장 놀라운 꿈에 사로잡혔다. 빛이 흘러넘치는 교회에 그가 에이미와 함께 앉아 있었다. 눈이 멀 것같이 밝고 아름다운 빛이었다…… 그동안 온 나라는 미리 그를 애도할 준비를 하면서 동시에 청년들의 타락에 대해 논란을 벌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전 세대의 숭고한 영웅들과 지금 세대의 비열하고 살인적인 범죄성을 비교했다. 정작 그는 자신의 삶이 이제 막 시작했음을 깨닫고 기가 막혔다. 이미 오래전에 깨끗이 개간된 멀고 먼 티크 정글에서,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시암이라는 나라에서, 더이상 살아 있지 않은 남자가 마침내 잠들었다.
기억에 남는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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