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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캄포 산토 - W. G. 제발트(Winfried Georg Seba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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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포 산토

W. G. 제발트(Winfried Georg Seba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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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아무리 격한 심리적 발작을 일으킨 사람이라도 그 내면 깊은 곳 어디선가는 자신이 말 그대로 자기 몸에 쓰인 연극에 출연한 것일 뿐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캄포 산토」)

화장터 장례식에서 포차를 타고 화장소로 들어가는 관을 보면, 누군들 우리가 고인과 이별하는 방식이 대놓고 초라하며 조급하기 이를 데 없다고 생각지 않겠는가. 우리가 죽은 자에게 내주는 자리는 점점 더 협소해지고 있으며 몇 년이 지나면 그 자리조차 없어지는 일이 빈번해지리라. (「캄포 산토」)

에세이

사물들은 그저 우리에게 더 잘 파악되기 위해서 이름을 갖는 것이 아닌가. 마치 우리가 현실에서 뽑아낸 지도의 빈 곳들이 정신의 식민제국 확대라는 목적하에 사라져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생소, 통합, 위기―페터 한트케의 연극 <카스파르>에 대하여」)

생존자들이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은 어느 밤이었다. “문득 한 사람이 잠꼬대를 했다. 아무도 그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두 불안해져서 불가에서 일어나 떠났다. 그러고는 겁을 먹은 채 차디찬 어둠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그 꿈꾸는 자에게 발길질을 했다. 그때 그자가 깨어났다. ‘꿈을 꿨습니다. 내가 무슨 꿈을 꿨는지 털어놔야겠어요. 난 우리 뒤에 있는 저기 저 속에 있었어요.’ 그는 노래를 불렀다. 불길이 사그러들었다. 여자들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말해야겠어요, 우리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러자 남자들이 모여 숙덕댔다. ‘그가 꿈꾼 대로 된다면 우린 얼어죽을 거요. 저자를 때려죽입시다!’ 그들은 그자를 때려죽였다. 그때 불이 다시 살아났고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역사와 자연사 사이―총체적 파괴를 다룬 문학 서술에 대하여」)

공중전의 전략은 가공할 만한 복잡성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중략) 클루게가 작전 수립자의 관점에서 주목한 이 모든 측면은, 이 파괴 계획에 엄청나게 많은 두뇌와 노동력과 자본이 투입되었으며 그만큼 축적된 잠재력의 압박하에서 계획은 결국 반드시 완수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역사와 자연사 사이―총체적 파괴를 다룬 문학 서술에 대하여」)

착한 독일 남자가 폴란드 여자 또는 유대인 여자와 ‘만나는’ 연애담으로 포장된 수많은 1950년대 문학에서 부담스러운 과거는 대부분 감정적이라기보다 감상적으로 ‘청산됐으며’ 동시에 (중략) 파시즘 체제의 희생자에 대한 자세한 조사를 회피하고자 절박하게 노력했고 결국 성공했다. (「애도의 구축―귄터 그라스와 볼프강 힐데스하이머」)

어떻게 보면 거의 기질적으로 타고났다 할 수 있을 문인들의 이런 격한 탐구 충동에도 불구하고 “그때 우리가 우리를 지배하는 인종에게 제물로 바칠 예정이었던 실제 인간들은 (중략) 우리의 감각적 지각에 아직 포착되지 않았다.” 그라스가 『달팽이의 일기』에서 부족한 부분을 어느 정도 메우는 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텔아비브에 사는 역사가의 노고 덕분이고, 이는 오늘날의 문학이 자력으로는 더이상 진리를 창작하지 못함을 다시금 명명백백 보여준다. (「애도의 구축―귄터 그라스와 볼프강 힐데스하이머」)

우리의 전후문학에서 조용한 영웅의 인생을 영위하는 선량하고 결백한 독일인들이 실제로 독자에게 넌지시 암시되는 그 방식으로 존재했는가의 여부는 객관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선한 독일인들이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뵐의 문학에서 확인 가능하듯이, “리비우의 믿음 없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성聖 금요일의 주기도문을 외는 것 이상으로 한 일이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 더 중요하다. (「애도의 구축―귄터 그라스와 볼프강 힐데스하이머」)

생각할 수 있는 온갖 형벌을 환상적으로 상상하는 일은 엄격한 도덕주의자 페터 바이스에게 일종의 예비교육 역할을 했다. 절단과 훼손 행위는 기억이라는 정언명령을 구체화한 대응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 행위들은 언제나 존재하는 탓에?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영적 평온과 질서의 문지기라 불렀던?능동적 망각에 확실히 제동을 걸 수 있다. 따라서 바이스는 기억해야 할 것이 있으면 문학 작업에 착수하여 연옥으로 향한다. (「통회―페터 바이스 작품에 나타난 기억과 잔혹에 대하여」)

그가 당한 피해는 어떤 것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다는 점, 이것이 바로 피해자의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상태를 말해준다. 그런 상태에서도 역사, 특히 가혹한 폭력이라는 역사의 원칙은 계속 작동한다. 한번 피해자가 되면 영원히 피해자로 남는다. 장 아메리는 이렇게 쓴다. “나는 그후 이십이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양팔이 뒤로 꺾여 공중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아메리도 알았겠지만, 어떤 식의 법적 판결과 보상으로도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에 대응하는 정동은 침묵뿐이다. 기껏해야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뿐인 파시스트 정권 이후 세대가 피해자들의 자리를 찬탈하는 상황에 맞서 아메리는 위협적으로 강요받았던 침묵을 깨뜨리고자 했다. (「밤새의 눈으로―장 아메리에 대하여」)

죽음을 경험했는데도 그 죽음을 넘어 연장되어버린 실존의 중심에 자리한 감정은 죄책감, 저 생존의 죄책감이다. 죄책감은 니덜랜드가 죽음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지닌 가장 무거운 심리적 부담감이라고 진단한 감정이다. (중략) 생존자들이 그런 죄책감에 시달린다는 것은 가장 섬뜩한 아이러니다. 살아남은 희생자들은 “압도당하고 위축됐다는 느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며, 만성적인 “개인적 불편감, 우울증 상태와 무감각적 위축 상태”로 고통받으며, “가장 처절한 형태로 죽음을 마주하면서 얻은” 지워질 수 없는 “심리적 상흔”을 내면에 깊이 새기고 다닌다. (「밤새의 눈으로―장 아메리에 대하여」)

내가 아는 한 나보코프가 유령학만큼 열중했던 것은 없다. 그가 나방과 나비 연구에 열정을 바쳤음은 그보다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이는 유령학에 비하면 곁가지에 불과했다. 어찌됐든 나보코프 산문 중 가장 빛나는 대목 상당수는, 우리의 세상만사가 어떤 분류표에도 아직 기재되지 않은 외부의 종種에게 관찰당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들의 밀사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연극에 어쩌다 한 번씩 객연으로 출연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인상을 자아낸다. 나보코프가 추측하건대 그들이 우리에게 그렇듯이 우리 또한 그들에게 출신과 성격이 불분명한 덧없고 투명한 존재로 비칠 것이다. 그런 그들을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바로 꿈속이며, 꿈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생전 한 번도 들러본 적 없는 곳에 간혹 출몰한다. (「꿈의 직물―나보코프에 대한 촌평」)

인생은, 운명이 사람을 말 대신 잡고 두는, 밤과 낮이 격자무늬를 이루는 체스판이다. 이쪽으로 저쪽으로 움직여 잡고 죽이고, 하나씩 하나씩 상자로 돌려보낸다. (「꿈의 직물―나보코프에 대한 촌평」)

카프카의 일기는 마치 영화관에서처럼 일상적인 삶이 우리 눈앞에서 무게 없는 이미지들로 분해되는 그런 경험담들로 가득하다. 예를 들면 그는 지금 승강장에 서서 배우 플로라 클루크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다. (중략)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편집된 이 일기장의 메모는 평생의 드라마를 아우르고 있다─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이별의 고통, 죽음으로의 침하, 행복을 도둑맞은 자의 귀환. (「영화관에 간 카프카」)

잘 알려져 있다시피 카프카는 모든 유토피아를 불신했다. 그는 생을 마감하기 얼마 전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가나안에서 추방되어 사십 년간 내쫓겨 있었으며, 이따금 자신을 원했던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수상쩍었고, 자신은 그저 물이 바다로 가는 것처럼 고독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원치 않았노라고. 실제로 말년의 사진 속 카프카처럼 그토록 혼자로 보이는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영화관에 간 카프카」)

인간과 고등어의 삶과 죽음의 관계는 우리가 예감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리라. 나는 첫 낚싯줄을 끌어올릴 때 그랑빌의 판화 작품을 생각했다. 그 그림에서 슈미제트, 넥타이, 연미복을 차려입은 대여섯 마리의 물고기들은 잘 차려진 식탁에 앉아 비정하게도 동족들을 막 먹어치우기 일보직전이다. 그것들이 우리 중 누군가를 먹으려 했다면 조금은 덜 끔찍했을까. 아마도 그래서일까, 물고기 꿈은 죽음을 불러온다 하지 않던가. (「스콤베르 스콤브루스 또는 흔하디흔한 고등어―얀 페터 트리프의 그림에 대하여」)

일종의 물신적인 소유욕은 채취와 수집벽의 특징이며, 발견된 파편들을 신비롭고 의미심장한 기억으로 변형시킨다. 그 기억은 살아 있는 존재인 우리를 배제시키는 어떤 것들을 우리에게 연상시킨다. 이것은 작가들이 사용하는 수법의 여러 층위에서 가장 기저에 있는 것일 듯싶다. (「적갈색 가죽 조각의 비밀―브루스 채트윈에게 다가서며」)

글쓰기의 형식은 많고 많다. 하지만 오직 문학적인 글쓰기에서만이 사실을 등록하고 탐구하는 것을 넘어 재건하려는 노력이 그 관건으로 대두한다. (「재건 시도」)

기억에 남는 문구

인생은, 운명이 사람을 말 대신 잡고 두는,
밤과 낮이 격자무늬를 이루는 체스판이다.
이쪽으로 저쪽으로 움직여 잡고 죽이고,
하나씩 하나씩 상자로 돌려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