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아빠, 제발 이제는 하지 말아줘’라고 부탁하던 것도 끝이다. 아빠의 그 짓은 부탁해서 멈추게 할 일이 아니라 원래 하면 안 되는 짓이었고, 감옥에 갇혀야 할 정도의 큰 죄였다. …… 왜 이리도 오랜 시간 문을 열어두고 있는지, 이제 탈 사람도 없구먼, 얼른 좀 닫아라, 좀 닫으란 말이다, 빨리 출발 좀 하자. 옆 칸과 연결된 가운데 문이 열리면 혹시라도 그 사람이 타서 나를 찾아다닐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했다.
“문이 닫힙니다.”
분명하게 들린다. 드디어 문이 닫혔다.
모든 칸의 문이 모두 닫혔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싶을 정도다. 문이 닫힌다. 천천히 지하철이 움직인다. 눈물이 흐른다.
‘자유다!’
엄마라는 사람은 워낙 결혼 초부터 계속된 매질에 익숙해지고 무기력해져 있었다. 왜 경찰을 부르지 않나 싶었지만, 그때는 부부싸움으로 경찰에 신고를 하면 ‘집안 문제’로 여기고 경찰이 집에 오지도 않았다. 엄마는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신고는 아예 생각조차 못 하게 되고, 내게 일어나는 일도 어디에 어떻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지 전혀 모른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에 엄마와 이야기 나누며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엄마도 죽느냐 사느냐 하는 위협을 계속 느끼며 살아서 딸을 돕는 건 생각조차 못 했다고 했다. 가족 모두 목숨을 위협하는 아빠라는 사람과 살면서 정상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 떨어진 것 같고,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잃어버린 듯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이제까지 살던 것하고는 완전 다른 세상이었다.
아빠는 없어졌다. 내게 아빠라는 존재는 없다. 아빠라는 사람이 내 팬티 속에 손을 넣은 첫날. 나는 이제 그 사람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웃고 떠들며 친할머니의 생일잔치를 준비했다. 평소처럼 대하는 그 사람의 쓰다듬기, 칭찬, 웃음소리가 이제는 모두 달라졌다.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아빠였지만 그나마 아빠라 여기던 마음까지 사라졌다.
나는 방문을 열고 부엌으로 도망갔다. 부엌에서 나와 연탄을 쌓아두는 구석진 곳으로 도망갔다. 아빠는 도망가는 나를 쫓아와 연탄집게로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맞아본 중에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맞은 곳은 금세 붉고 선명하게 살이 튀어 올랐다. 여기 저기 부풀어 오른 모양이 굵은 지렁이 같았다. 얼굴로 날아오는 연탄집게를 막으려고 올린 팔뚝이 감전된 듯 찌릿찌릿했다. 허벅지, 무릎 등 온몸에 굵은 지렁이가 감겼다. 맞으며 도망도 다니고, 소리도 질렀지만 매질은 계속됐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왜 가기 싫은지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 아빠가 내 몸 만졌어. 나중에 엄마랑 할머니한테 말해, 내 몸 만졌단 말이야.”
아침이 됐다. 미역국이 나왔다. 나는 산모인 거다. 누가 뭐래도 내 몸은 산모다.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메뉴는 정확히 기억난다. 의사는 병실에 와서 이제 좀 어떠냐고 하더니 자기 운전기사에게 말해뒀으니 퇴원해서 집까지 자기 차를 타고 가라고 했다. 의사의 친절함에 순간 ‘도와달라고 얘기할까?’ 싶은 생각이 스쳤다. 집에 가면 그 짓을 또 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없던 일이 될까봐 겁도 났고, 도움을 청하면 어떻게든 도와주지 않을까 싶어서 그랬다. 그런데 한편 겁도 났다. 친아빠가 친딸한테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6학년인 지금까지 거의 매일 강제로 그 짓을 한다는 게, 일반 사람들이 상상도 하지 못할 이야기라 나도 어떻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몰랐다. 아빠라는 사람은 이런 내 눈빛을 읽었는지 고맙다고 하며, 우리 딸애한테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다는 둥, 앞으로는 우리 애가 저런 일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둥 떠들었다.
그렇게 내 우정 섞인 풋사랑은 끝났다. 아빠라는 사람이 내게서 빼앗아간 많은 것들 중 내 힘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것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에 겪을 수 있는 일들, 남들이 추억이라 부르는 일들이 내게는 거의 없다. 그때 그 착한 오빠와 친하게 지냈다면 여중생의 풋풋함, 싱그러움, 그 오빠의 순수함, 진실함이 만나 《소나기》 같은 사랑 이야기가 내 인생에서 한 자리 차지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빠라는 사람이 내게 준 상처는 몸에 남은 상처에만 그치지 않는다. 내 영혼, 내 시간들에 입힌 상처에 견주면 몸의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다. 청소년기에 자연스럽게 경험해야 하는 것들 중 내게는 전혀 기억에 없는 일이 어디 풋사랑이나 첫사랑뿐이겠는가. 수학여행도 못 가고, 극기 훈련도 못 가게 했다. 심지어 전교 임원단 선거에 추천이 돼 나가게 됐을 때도 아빠라는 사람이 “너 남자애들하고 어울려서 놀려고 그 짓 하는 거지?”라며 밤새 패고 나서 하지 못하게 해서 출마했다 중도 포기하기도 했다.
조용히 반항하지 않고 당한다고 해서 그게 꺾인 것도 아니고, 포기한 것도 아니다. 그놈한테 동조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그때 그 상황 속에서도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내가 무너지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누구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렇게 살아내는 것이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저지른 더러운 짓을 완전히 무시하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그때도 학교에서 웃을 일이 있을 때는 웃고, 좋은 것이 있을 때는 좋아했고, 공부해야 할 때는 열심히 공부했다.
내가 겪은 일은 역사적으로 누구나 기억해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아빠라는 사람 탓에 겪은 고통에 관해서는 그 사람과 나 두 사람만 안다. 우리 둘 중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고 살다 죽으면 그 일은 없던 일이 될 수도 있다. 그 사람은 절대로 그 일들을 말하지 않을 것이고, 글로 쓰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이 입을 다물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나는 내가 입을 열어야 하는 이유를 더 확실히 알게 됐다. 그 사람이 내게 저지른 더러운 짓거리는 분명히 사실이다. 그 사람은 그때도 그런 것처럼, 지금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목사 행세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내게는 그 사람이 한 짓들이 내 영혼을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기도하고, 울부짖으며, 숨쉬고, 결국은 탈출하고, 살아남았다.
“야, 이년아, 거울에 네 얼굴 봤어, 얼굴을 찡그려? 네가 뭐 성모 마리아라도 되냐?”
머리 가죽이 벗겨진 것처럼 화끈거렸다. 거실까지 머리카락이 당겨지는 힘으로 끌려나왔다. 그 사람은 내 온몸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아니, 밟았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나는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네놈 딸이거든. 그래서 네가 성모 마리아랑 뭔 짓을 하든 나한테 상관없는데, 나한테는 이러면 안 되거든. 개썅, 미친 새끼야, 차라리 성모 마리아랑 그 짓을 해라.’
나는 쉽사리 용서를 말하고 싶지 않다. 욕할 만큼 하고, 미워할 만큼 미워하고, 죽이고 싶으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죽이고, 또 죽이면서 속이 풀릴 때까지 원 없이 욕하라고 말하고 싶다. 어설프게 미워하고, 대충 욕하지 말고, 완벽하게, 철저하게 온 마음을 다 실어서 더는 미워할 힘이 남지 않을 때까지 미워하라. 욕하고, 욕하다 더는 어떻게 욕해야 할지 모를 때까지, 세상에 있는 나쁜 표현은 다 써버려서 더는 할 말이 없을 때까지 욕하라.
아빠가 성폭력 한 것을 용서합니다. 어린 나이에 성폭력으로 임신하게 하고, 낙태까지 경험하게 한 것을 용서합니다. 수능 전날 밤 호텔에서 성폭력 하려다 말을 안 듣는다고 밤새 때린 것을 용서합니다. 강제로 행한 온갖 더러운 짓거리들, 그 짓들로 나를 상처 입힌 것을 용서합니다. 하루는 기절할 때까지 나를 때리고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다니고,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때린 뒤 다음 날 주민등록증 사진을 찍게 한 것을 용서합니다. 밤에 으슥한 산길에 차를 대놓고, 그곳에서 성폭력 한 것을 용서합니다. 내가 기침 감기가 심하게 걸려 계속해서 기침이 나오는데 그 짓거리 하겠다고 내 위에 올라타서는 계속 기침한다고 주먹으로 내 얼굴과 가슴을 내리치던 것을 용서합니다. 그 밖에도 참 많은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풀어내려고 한 자 한 자 쓴 것이 이 책으로 묶였습니다. 이제 곧 책이 세상에 나옵니다. 그 책을 통해서라도 아빠가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 아빠가 제게 상처 준 것이 무엇인지, 제가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는지 분명하게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을 추천한 크리에이터
이 책을 추천한 포스트
내 방에서 n번방까지 '그녀들'의 이야기 어떻게 들을 것인가 | 김영서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저자 | 여성 미투 안전 치유 | 세바시 1181회
강연자의 강연 소개 : 안전한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갖춰야 할까요? 나의 아픔을, 어려움을...
'책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 김누리 (0) | 2020.07.12 |
---|---|
습관이 무기가 될 때 - 허성준 (0) | 2020.07.12 |
부의 원천 - 타라 스와트(Tara Swart) (0) | 2020.07.11 |
시그니처 - 이항심 (0) | 2020.07.11 |
내 인생의 날개를 펼쳐라 - 이영현 (0) | 2020.0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