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지금(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는 몇 년에 한 번은 반드시 했던 일인데), 다시 한 번 칼브로 가서, 소년 시절 수천 번이나 낚싯대를 드리웠던 그 다리 난간에 십오 분 동안 걸터앉아 있게 된다면, 이 경험이 나에게 이토록 아름답고 이토록 인상적이었구나, 또다시 가슴이 저밀 만큼 깊고 기이한 감동을 느낄 것이다. 그 느낌, 한때 고향을 가졌었다는, 그 느낌! 한때 나는 세상의 어느 작은 장소에 있는 모든 집들과 모든 창들과 그 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한때 나는 이 세상의 어느 특정 장소와 연결되어 있었다. 뿌리와 생명으로 자신의 장소와 연결되어 있는 한 그루 나무처럼.
과거보다 더욱 풍부해진 목소리로, 수백 배나 더 충만한 뉘앙스로 나에게 말을 건다. 이제 나는 그리움에 잔뜩 취한 나머지 나만의 꿈의 색채로 베일에 싸인 먼 나라를 덧칠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내 눈동자는 거기 있는 사물 자체의 모습에 만족한다. 보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자 세계는 예전보다 더욱 아름다워졌다.
세계는 더욱 아름다워졌다. 나는 혼자지만, 혼자라는 사실을 괴로워하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소망하지 않는다. 가만히 누워, 햇빛에 온몸이 빨갛게 익도록 내버려 둘 뿐이다. 익을 대로 익어서 성숙해지기를 열망할 뿐이다. 나는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날 준비 또한 되어 있다.
나는 수첩을 꺼내 농가를 스케치한다. 독일식 지붕, 독일식 서까래와 박공, 이들 친근하고 익숙한 고향의 사물들에게 시선으로 작별을 고한다. 이 작별의 순간 나는 더욱 깊은 애정으로 고향의 것들을 다시 한 번 더 사랑한다. 내일이면 나는 다른 지붕을, 다른 오두막을 사랑하게 되리라. 사랑의 편지에서 흔히 쓰이는 문구와는 달리, 나는 내 마음을 이곳에 두고 떠나지 않는다. 절대로 아니다, 나는 마음을 갖고 길을 떠난다. 산 너머 저 먼 땅에 가서 살 때도 나는 마음이 필요하다. 나는 유목민이지 농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불충과 변덕 그리고 환상의 숭배자다. 세상의 어느 작은 부분에 내 사랑을 못 박아 두면서 자랑스러워하지 않으리라.
여름이면 여행을 떠났고, 조금이나마 예술품을 수집하기도 했지. 승마와 요트를 즐겼고 저녁에는 보르도산 와인을 마시면서 나 같은 독신자들과 어울렸어. 아침 식사 때는 샴페인과 세리주를 마셨고. 나는 몇 년 동안을 그런 환경에서 살았지만, 지금처럼 사는 것도 전혀 힘들지 않아.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승마와 요트, 그게 도대체 뭐가 중요한가? 약간의 철학만 갖춘다면 그 모두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임을, 그냥 하찮은 껍데기에 불과함을 쉽게 알 수 있는데 말이야.
그토록 많은 격정과 희생을 치르고 난 뒤 나는 목표에 도달했다. 그토록 불가능하게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인이 되었다.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싸움이었지만 나는 세상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것 같았다. 거의 파멸하기 직전까지 갔던 학창 시절과 습작 시절의 쓰라린 경험은 웃으면서 잊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때까지 나에게 절망하기만 했던 친지와 친구들도 다정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나는 승리했다. 내가 아무리 바보 같고 한심한 행동을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매혹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매혹되어 있는 것조차도 매혹적이라고 생각했다. 그제야 나는 수년 동안 내가 얼마나 끔찍한 고독과 금욕, 그리고 위태로움 속에서 살았는지 깨달았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다는 쾌적한 기분이 참으로 좋았다. 나는 만족한 인간으로 살기 시작했다. (…) 그것을 계기로 나는 다시 나 자신으로 되돌아왔다. 다시 세계와의 불화가 시작되었다. 나는 다시금 과거의 학교에 들어간 셈이었고, 그래서 다시금 자신과 주변 환경에 대한 만족감을 상실했다. 이런 체험을 통해 나는 비로소 삶의 문지방을 넘어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표현이다. 모든 자연은 이미지이고 언어이고 색채의 상형 문자이다. 현대의 우리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 지식에도 불구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그런 교육을 받지도 못한다. 우리는 자연과 불화하고 자연과 다툼을 벌이고 있다. 다른 시대에는, 아마도 기계 문명이 지상을 정복해 버리기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자연이 보여 주는 신비한 표정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 지금 우리보다 더 쉽고도 순수하게 자연의 언어를 해독할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느낌은 센티멘털한 감상은 결코 아니었다. 인간이 자연을 대할 때 센티멘털한 감상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아마도 자연 앞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에 남는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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