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그러던 내가 어쩌다 달리기를 만났다. 어떻게 뛰어야 하는지도 뭘 입고 무슨 운동화를 신어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그냥 달렸다. … 달리는 즐거움에 집중하기보다 내가 어떻게 보여질까가 더 신경 쓰였고 달린 후에 찾아오는 근육통에 기분이 상했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내가 남의 시선을 그토록 신경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답게 살면 될 것을 왜 남들처럼 살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걸으면서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I can do it. 그런 내 모습에 일행은 여러 번 웃음을 터뜨렸다.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냐고 웃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같은 마음으로 응원했다고 한다. 사막에서의 시간은 가보기 전 막연히 생각했던 것처럼 삭막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 일상이 있는 곳보다 훨씬 사람 냄새 나는 정겨운 곳이었다. 그리고 자연의 일부가 되는 신비한 경험이 가능한 아름다운 곳이었다.
달리기를 하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멈추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물론 멈춰 서도 괜찮다. 하지만 그 순간을 극복하고 이겨낸 후의 만족감은 자신감으로 이어진다. 어떤 마음으로 달리냐고? 숨이 차서 죽을 것 같고 다리가 무거워 들어올리기가 힘든 순간엔 ‘그냥 한 걸음만 더 달려보자’라는 말을 수없이 되뇐다.
달리기를 만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요즘엔 스트레스를 받거나, 좋은 일이 있거나, 비가 오거나 날이 춥거나 감정이나 날씨 여부에 상관없이 자주 격하게 달리고 싶어진다고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그 긴 시간을 달리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지? 또는 뭘 떠올리며 달려야 할지 궁금했다. 지루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막상 달려보니 그 시간 동안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한 가지 행위를 반복적으로 하다보면 뇌가 외부 자극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디폴트 모드가 된다고 한다. 이른바 달리기를 통한 명상효과를 경험한 것이다. 달리기를 하면서 자꾸만 모든 게 새롭게 다가오고 매번 처음 해보는 것투성이다. 평생 모르고 지나갔을 수도 있는 몸의 감각들과 감정의 변화들을 겪을 수 있는 나는 참 행운아다.
나에게 달리기란 희열과 고통, 충만함과 결핍, 자존감과 자괴감, 나아감과 멈춤 사이를 부단히 오가는 그 무엇이다. 양 너울에서 중심을 잡으며 새로운 감정들을 느끼고 생활에 활력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지금도 조금씩 성장 중이다.
1킬로그램이 빠질 때마다 기록은 1분씩 단축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달리기에 있어 체중조절은 중요하다. 그런데 프로가 아닌 이상 이것에 스트레스 받을 필요는 없다. 나처럼 즐거워서 달리다보면 자연스레 자신에게 맞는 적정 체중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근육은 점점 밀도가 높아지며 탄탄해질 것이다. 헐떡대던 심장은 어느새 페이스에 적응해 한결 편해진다. 그만큼 심폐기능도 강화가 된 것이다. 이렇게 조금씩 나타나는 몸의 변화를 느끼며 어제보다 나아진 나를 발견한다.
달리다보면 매번 새로운 남산을 만나게 된다. 적당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구간도 있고 한양 도성길을 따라 야경을 즐기며 달리는 코스도 있다. … 남산의 밤은 낮만큼 아름답다. 전망대에서 야경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해외 그 어느 야경 명소와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다. … 나는 특히 월요일의 남산을 좋아한다. 화요일에도 수요일에도 목요일에도 주말에도 달려봤지만 남산의 월요일이 제일 고요하기 때문이다.
삶과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나는 그 방법 중 하나로 달리기를 꼽는다. 달리기가 인문학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갸우뚱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내가 경험하고 있는 달리기는 삶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줬다. … 여기저기 끼어 있던 나태함, 안이함, 무기력이라는 때를 벗겨내주었다. 그렇게 깨어난 몸과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있었고, 살아갈 수 있었고 나아가고 있다. 이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나에게 실천하는 삶과 사유하는 삶을 연결해주는 그 고리가 달리기다.
“나는 행복하기 때문에 달리고, 달리기 때문에 행복하다. 이 과정을 통해 가장 순수한 나를 만난다. 달리기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된다.” 마라토너 이언 톰슨의 말처럼 나는 장거리 레이스를 하면서 행복감을 자주 느낀다. 자연을 달리는 내 몸이 자랑스럽다. 그리고 달리기라면 질색하던 내가 그 순간을 즐기는 모습이 재미있다.
내 삼십대 중반은 스트레스와 통증, 그리고 무기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몸은 제 기능을 잃어 비실댔다. 잠을 자려고 누워 있을 때, 식사를 할 때, 사람들을 만날 때, 일을 할 때 등 그 순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사고 충격 때문에 수시로 뻐근해오는 뒷목에 내 모든 신경이 집중됐다. 작은 통증에도 예민해졌고, 몸을 쉬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사람 역시 한 해가 지나간다고 해서 그냥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는 그저 주어지는 것일지라도 나잇값을 제대로 하기란 쉽지 않다. 나도 늘 고민한다. 나이 먹는 것을 걱정하기보다 나잇값을 못하는 어른아이가 되고 싶지 않다. 한참 동안을 달력 한 장이 넘어가고 나이 한 살을 더 먹어왔지만 여전히 같은 자리에 놓인 내 모습을 발견했다. 삶이 매너리즘에 빠지는 순간 열정이나 개인의 발전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을 일상이라 한다. 반복되는 일상에 안주해버리게 되면 몸도 생각도 그 범위에서 정체될 수밖에 없다. 변화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다.
우메노사또 트레일런은 겉치레를 걷어낸 담백하고 요란함 없는 대회였다. 완주 메달도 없었고 그럴듯한 기념품도 없었지만 함께한 모두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했다. 가져가는 기념품보다 따뜻한 기억을 선물받는 것이 내게는 더 의미가 있었다. 빨리 봄을 맞이해서 좋았고, 꽃길을 달려서 행복했다. 그거면 됐다.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살아 있는 커뮤니티인 에너지 클럽과 마커스 독서 나비가 러닝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뭉쳤다. 그리고 에너지 마커스 러닝팀이라고 부르게 됐다. 처음에는 7명이 모여 나와 함께 교대 트랙을 달렸다. 내가 알고 있고 경험한 내용을 토대로 기본자세를 잡고 조깅을 하면서 달리기와 친해지기를 시작했고 7명의 러너가 있던 단톡방은 어느새 24명으로 늘어났다. 게다가 2019년 손기정 평화 마라톤에 무려 15명의 러너가 참여해서 모두 목표를 달성했다. … 누구에게는 별 볼일 없는 목표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런 목표가 참 좋다. 속도 경쟁을 하거나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기보다 자신의 걸음, 호흡에 맞춰 집중하며 즐기는 것의 가치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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