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전…… 언제나 여기 있겠습니다. 저기 커다란 소나무처럼요.”
미주는 말없이 돌아섰다. 가슴속으로 성급한 가을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무슨 뜻이지? 언제나…… 여기 있겠다고? 소나무처럼……? 아니 그 말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어. 내게는 그저 바다의 느낌으로 남을 뿐이야.
일행이 묵고 있는 텐트 쪽을 향해 걷던 미주는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승우는 백사장에 붙박인 나무처럼 저만치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미주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승우가 지닌 마음의 깊이와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나는 당신을 은혜하고 고와하며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쉼 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국화꽃 향기가 나는 사람이여, 내 마음을 받아 주십시오.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나는 당신의 향기로 이미 눈 멀고 귀 멀어 버렸습니다. 당신이 내게 지상에 살아 있는 유일한 한 사람의 여자가 된 지 이미 8년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주는 무심함이 내게는 참기 힘든 가혹함이었지만 난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10년을 채우고 20년도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성급하게 내 마음을 온전히 바치는 것은 내가 미력하나마 당신을 도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단 한 번 열리는 마음의 보석 상자.
승우는 그 상자를 미주에게 처음 열어 주고 싶었다. 그것이 이루어질지 못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어도, 그녀만이 열 수 있는 마음의 보석 상자를 가졌다는 건 눈부신 일이다. 육체의 미로를 통해 완전한 사랑을 찾아가는 길. 상자에서나 램프나 촛불이 나올 것이다. 세상의 멀고 어두운 길을 걸어갈 때 환히 비춰 줄 수 있는 꺼지지 않는 등불 말이다.
미주는 승우의 눈과 희고 빛나는 얼굴, 약간 젖은 머리카락을 눈에 천천히 담은 뒤 살포시 눈을 감았다. 열 손가락을 다 펴고 만져 본 그의 몸은 자작나무 같았다. 그의 살갗과 움직임에는 마음이 온전히 배어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솟아나왔다.
나는 당신을 만질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해서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었습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당신을 내가 오랫동안 힘들게 했다는 아픔과 후회도 함께 만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당신의 이 모습을 잊지 않고 가져갈 수 있을까. 당신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숨결과 가슴의 움직임, 뒤척거림까지 가져갈 수 있을까, 밤새워 그것만을 생각했습니다.
손바닥에 묻혀 가면 안 될까. 입술 속에 담아 가면 안 될까. 죽으면 제일 오래 남는다는 머리카락 속에 담아 가면 안 될까. 뼛속 마디마디에 담아 가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당신의 머리카락에서부터 발끝까지 조심스레 천 번의 입술을 맞추었습니다. 내가 떠나더라도 당신의 온몸은 내 입술의 꽃으로 무성하길 바라며. 내 손가락이 닿았던 곳이 언제나 당신을 지켜주길 바라며. 평화롭기를 바라며.
승우의 뒤에 선 은행나무는 거대한 그림자 나무가 되어 양 귀와 가지 끝에 장신으로 반짝이는 별 귀고리와 머리핀을 벌써 꽂은 듯 영롱한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삽시간에 어두워지고 삽시간에 푸르러지고 삽시간에 초롱초롱 빛이 나는 것들. 승우가 손을 잡아 주자 미주는 걸음을 멈추고 운동장과 흰 건물과 하늘에 뜬 황금 달과, 주먹처럼 소 눈망울처럼 굵어지기 시작하는 별무리를 올려다보고 다시 운동장과 교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 아름답지 않아? 여긴 우리 둘만의 세계야. 고요와 외로움과 쓸쓸함이 깃들여 우리가 서로를 더욱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별 같은 세계. 내가 왜 여길 그토록 그리워했는지 이제는 확연히 알 수 있을 것 같아.”
푸르른 하늘에서 불현듯 거대한 은행나무 잎들을 흔드는 한줄기 바람이 휙, 하고 불어왔다. 승우의 앞머리칼을 바람이 흩뜨렸다. 그리고 그 바람 줄기 속에서 문득 국화 향기가 났다. 싸하고 달콤하며 연한 국화 향……, 국화 향이었다.
승우는 눈을 크게 끔벅였다. 도자기를 만들 때 미주가 했던 말……. 승우는 미주를 떠올리며 거대한 은행나무를 향해, 사방을 향해 코를 큼큼거렸다.
아…… 이건…… 이건……. 분명히 국화 향이었다. 또렷이. 바람결 끝이 완연한. 미주의 머릿결에서 나던 그 국화 향기 말이다.
느낄 수 있었다. 슬픔이 퍼뜨리는 사랑의 향기를.
수만 개의 작은 손바닥을 흔드는 것 같은 은행나무 가지를 올려다보며 승우는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를 향해 떨리는 흰 손을 뻗으며 눈부신 미소를 머금었다.
미주야…… 너…… 너니? 너 거기 올라앉아 있는 거니? 하늘로 날아오르기 전에 수많은 은행잎으로 안녕…… 안녕이라고 지금 내게 말하고 …… 있는 거니?
기억에 남는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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