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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 한승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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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한승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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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과거는 흔적을 남긴다.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해야 한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화를 내지 않는다, 싸우는 사람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다, 행복한 커플은 싸우지 않는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바람을 피운다, 남성은 인정을 원하고 여성은 공감을 원한다 등 뚜렷한 근거 없이 편견과 선입견을 바탕으로 개인적 감상과 유추에 기댄 주장이 적지 않다.

결국 자기 할 일을 잘하고 성실하게 살면, 즉 공동체에 기여하고 그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면 자존감이 올라간다는 말인데, 그 공동체의 지침이나 문화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 다는 생각은 왜 하질 않는 것일까?

이것을 독자에게 납득시키려면, 그러한 ‘교훈’을 마음 깊이 와닿게 하려면, 복잡한 수학 공식을 증명하는 과정처럼 텍스트로서 일정한 ‘증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증명은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만들어준다. 그런 차원에서 그저 결론만 툭툭 던지는 스님의 격언은 결국 식상하고 진부한, ‘남들도 다 아는’ 이야기의 범주를 벗어나기 어렵다. 독자 입장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읽고 듣는 것은 문제를 풀지 않고 해답지를 보고 답을 써 넣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이런 식으로 하는 공부는 실력 향상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작가 입장에서는 시나 에세이 장르는 주장이나 논설과는 다르다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개인적 경험을 통해 영감을 받아 쓴 글이므로 명확한 주장과 근거를 대라는 것은 부당하게 느껴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자가 별 생각 없이 술술 읽는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학 작품 역시도 실은 개연성이 엄청나게 중요한 장르다.

책 속에서 ‘좋은 연애’의 기준으로 제시되는 것들은 서로 얼마나 연락을 자주 하는지, 남들에게 서로에 대해서 얼마나 자랑을 하는지, 핸드폰 배경화면을 서로의 사진으로 바꿔놓는다든지, 각종 기념일이나 이벤트를 한다든지 등등 피상적인 것들이다. 그런 기준으로 ‘사랑’의 완성도나 질을 평가할 수가 있나? 고작 반나절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분노하고 서운해하는 모습을 과연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나? 아니, 사랑이라는 것이 애초에 무엇인가? 오오, 자꾸만 질문이 철학적으로 넘어간다. 어쩌면 독자로 하여금 ‘사랑’에 관한 심도 있는 고찰을 하게 만들려는 속 깊은 의도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의 나는 그와 같은 자기혐오나 자존감에 대한 고민이 결코 나만의 특별한 문제가 아니라 기쁨과 슬픔, 분노와 즐거움, 시기와 질투같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기 마련인 보편적인 것임을 미처 몰랐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겪는 감정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방황했던 것이다.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와 같은 캐릭터 출판물들은 마치 아이디어로 승부하고 트렌드를 주도하는 출판계의 초대박 베스트셀러처럼 보이지만, 결국 잠재독자를 계속 사라지게 만들고 책을 책답지 못하게 만드는, 출판계의 황소개구리 같은 존재라는 이야기다.

정말이지 로맨스 작가들이 M&A 회사에 왜 이렇게 집착을 보이는지 모르겠다. <귀여운 여인>의 리처드 기어부터 시작해서 그 외 셀 수 없는 많은 작품에서 남자 주인공들이 M&A 회사를 경영하곤 했는데, 윌의 직업 역시 그렇다. 윌은 사고를 당하기 직전까지 무려 33세의 어린 나이에 M&A 회사의 대표를 맡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기업도 아니고 반드시 M&A 회사여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아마도 기업을 조각조각 해체시켜 팔아먹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하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하겠지… 뭐 이런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인 것 같기는 합니다만… 현실은 33세의 몸짱 청년보다는 60대 배 나온 아저씨일 확률이 높겠죠.

추리소설을 일부러 찾아 읽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그 이유는 아무래도 납득이 안 되기 때문인 것 같다. 간단히 말해 사람을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죽여야 할 일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여기서의 복잡함은 살인을 마구잡이로 저질러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모기를 예로 들자면, 근처에 모기가 날아다니는데 그냥 손으로 탁 치지 않고, 굉장히 오랜 시간을 들여 살충제를 도포한 비누거품으로 인공 거미줄을 만든 뒤, 집 안 곳곳에 트랩을 설치하고, 모기가 좋아할 만한 향기를 그 주변에 뿌려 유인하여 죽인다… 비누거품은 자동 소멸되도록 한다… 류의 복잡함을 뜻한다. 아, 그럴 시간에 그냥 좀 죽여!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등장인물들이 내뱉는 대사 또한 아주 전형적이기 그지없다. 드라마로 치면 “그만둬! 이런 행동은 당신답지 않아!” 하고 남자 주인공이 외치면, “나다운 게 뭔데요? 네? 나다운 게 뭐냐고요!” 하며 여자 주인공이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는 수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인스타그램 사진 속의 탁자 위에 『82년생 김지영』이 놓여 있다고 기겁을 하며 호들갑을 떨고 ‘아이고 우리 ××도 이제 꼴페미가 되어버리는 겁니까! 한때는 너와 결혼까지 생각했는데, 이젠 사진첩에 있는 너의 사진을 모두 지워버리겠다!’고 장엄하게 선언하는 행위는 아이러니하게도 소설 속 김지영 씨의 삶을 더욱 증명하는 행위란 얘기다.

물론 하루키는 소설 속에서 그것이야말로 덴고와 아오마메를 연결시킬 수 있었던 방법인 양 설명을 하고, 아동강간 피해자야말로 아오마메에게 강렬한 자극을 주며 그녀를 ‘각성’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던 것처럼 그려내고 있지만, 글쎄… 남성과 여성의 교감을 오로지 섹스 하나로밖에 상상하지 못하는 것, 폭력적인 장면을 묘사할 때 여성이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 장면밖에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남성 창작자들의 흔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랄까.

말하자면 쓰고 있는 본인은 좋아, 자연스러웠어라고 만족스러워 할지 모르지만 남들 눈에는 그 속이 빤히 다 들여다보이는, 글쓴이의 정체와 욕구가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그런 문장들이란 것이다. 결국 ‘요염한 암고양이’ 바스테트는 여성의 성별을 지녔다면 고양이마저 성적으로 대상화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작가의 욕구를 그대로 드러냈을뿐더러 그마저도 제대로 대상화하는 데 실패한 형편없는 캐릭터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해야겠다. 요염함은커녕 나이 든 아저씨가 뇌내 판타지를 실현하기 위해 억지로 젊은 여성인 척하는 것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더 많은 사람을 구하고 싶다거나 세상을 더 좋아지게 만들고 싶다는 신념은 실상 전체에서 소외된 일부, 그 안에 속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애정이 바탕이 되었을 때에만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공부는 기본적으로 어려운 것이고, 고달픈 것이고, 괴로운 것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공부하는 사이 끊임없이 벽에 부딪힌다. 자신의 나약함과 게으름을 수도 없이 직면하고, 자신 의 지적 능력의 한계를 깨닫고 좌절하기도 한다. 그렇게 공부의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의지력은 어느 정도인지, 관심사는 어떠한지, 무엇에 능숙하고 무엇에 미숙한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싫어하는지, 어떤 유혹에 강하고 어떤 유혹에 약한지, 유혹의 순간에 어떻게 자기합리화를 하는지 등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서라는 것은 강제로 시키면 시킬수록 본래의 목적에서 더 멀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재미를 느끼고 흥미를 느껴야 자발적인 독서가 가능해지고 그 안에서 기쁨을 찾고 점차 관심사가 확장되면서 본격적인 문해력을 기를 수 있다. 그것은 누가 옆에서 강제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누가 시키면 시킬수록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강제적 독서모임’이나 ‘스파르타 독서모임’ 콘셉트로 막말과 욕설을 하는 식의 독서법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말해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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