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처음 이런 상황에 부딪혔을 때는 고통스럽고 기운 빠지는 일로만 여겨졌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부모님이 강인하고 삶이 무엇을 요구하든 의연하게 버틸 거라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아닌 부모님이 약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동안 나는 이 새로운 역할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치매 환자의 삶을 새로운 기준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아버지에게 치매 밖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족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환자의 현실을 인정하고 그가 겪을 고난을 조금이나마 줄이려고 노력하는 것뿐이다.
이제 아버지가 내 세계로 건너올 수 없으니 내가 아버지에게로 건너가야 한다.
아우구스트 가이거의 위트와 지혜. 아버지에게서 말이 더디게 새어나오고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감탄스러운 문장들이 점점 드물어지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이 모든 게 사라져간다는 것이. 마치 피를 흘리는 아버지를 슬로모션으로 지켜보는 느낌이다.
집에 있으면서도 여기가 집이 아니라는 고통스러운 의식은 이 병의 증상이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치매 환자는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운 탓에 안정감을 상실하고 그래서 그 느낌을 되찾을 수 있을 만한 장소를 그리워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친밀한 장소에 있어도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는 까닭에 자신의 침대마저 안식처라고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1970년대 말 날씨가 춥거나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우리는 주방 식탁에 둘러앉아 인생 게임을 했다. (……) 당시 우리는 짐작하지 못했었다. 게임에서 거치는 여정은 실제 인생에서 우리는 기다리는 것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였다는 것을. 또한 까맣게 몰랐었다. 낙오하느냐 앞으로 나아가느냐는 사실 운에 달린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알츠하이머병은 분명 이득이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자식들과 손자들은 알츠하이머를 통해 여러 교훈을 얻었다. (……)
인생의 마지막 단계인 노년은 끊임없이 변해서 늘 다시 새롭게 배워야 하는 일종의 문화양식이다.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더는 줄 게 없어도, 적어도 늙고 아픈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려줄 수 있다. 좋은 쪽으로 가정하면, 이것도 아버지로서의 일이고 자식으로서의 일일 수 있다.
우리 사이에 뭔가가 있다. 세상을 향해 내 마음을 더 활짝 열게 만든 뭔가가. 그것은 말하자면 보통 알츠하이머병의 단점이라고들 하는 것, 즉 관계 단절의 반대다. 때로는 관계가 맺어지기도 한다.
기억에 남는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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