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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 박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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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란다

박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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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남자아이는 엄마를 자신의 일부로 인식하므로 성인이 된 후에도 아내나 연인을 자신의 일부, 혹은 부분으로 여기면서 그녀의 희생이나 헌신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다 보니 딸과 아들을 모두 키우는 경우, 엄마의 요구를 딸아이가 재빨리 먼저 알아차리고 맞히는 경우가 많지요. 엄마 또한 그것을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여기고, 아들보다 딸에게 더 많은 요구와 포기, 양보를 은근히 강요하기도 하지요.
- ‘사랑은 아들에게, 요구는 딸에게?’에서

중요한 것은 아이를 케어하는 엄마의 태도입니다. 엄마가 불안하면 아이도 불안하며, 그 불안에 엄마보다 더 크게 압도될 수 있습니다. 엄마가 엄마 자신의 불안의 정체를 알고 관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이미 외부에서 일어난 불행한 상황을 부모, 특히 엄마가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주하느냐는 아이의 정신 건강에 안정을 주느냐 불안을 주느냐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 ‘차라리 엄마 자궁 속으로 들어가 버릴까?’에서

그렇게 자신을 깎아내리지 않아도, 그렇게 자신을 죽이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데,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녀들은 보호받아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느낍니다. 행복한 여성의 이미지가 다소 가부장적인 이미지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소녀의 아우성이고, 어린 소녀의 환상 속 사랑일 뿐입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대상에게 보호받지 않아도 스스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 ‘엄마보다 행복하지 않으려 애쓰는 딸들’에서

엄마가 보기에 아이가 왜곡되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거나 생각하고 있다면, “네 생각과 감정은 그렇구나…”가 끝이어야 합니다. 그 생각에 가치와 평가가 들어가는 순간부터 아이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워집니다. 나 자신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타인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지요. 나를 적절한 감각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거나 수용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감정은 죄가 없다’에서

좋은 엄마란 없습니다. 내 모습인 채로 충분히 내 아이와 개별적이고 독특한 관계를 맺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요. 소극적인 엄마라면 나서지 않고 조용한 모습의 엄마를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데, 엄마인 내가 소극적인 내 모습이 불편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당당하게 “네 엄마는 그런 엄마야”라고 말할 수 있지요.
- ‘우리 엄마는 없고, 내 엄마만 있을 뿐이다’에서

내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를 유심히 관찰해 보면, 누군가가 나를 대했던 그 태도로 아이를 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엄마가 나를 홀대했다면 나 자신도 아이를 홀대하기 쉽고, 딸보다는 아들이 우선인 엄마가 있었다면 꼭 가부장적인 분위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 또한 아들을 우선시하는 태도가 나타날 수 있지요.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딸아이를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대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가족이라는 이름의 연대는 질긴 심리적 반복을 만들어 내면서 삶을 형성해 갑니다.
- ‘나를 자세히 보면 엄마가 보인다’에서

“엄마는 너희를 똑같이 사랑해!”
아이들도 이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최선을 다해 공정과 공평을 위해 노력해도 사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똑같이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을 만큼 기계적이지는 못하지요. 아이들을 편애하지 않고 사랑해야 한다는 보편 지식과 이상적인 지식으로 길들여진 우리는 이 한 가지 사실을 달성하기 위해 무수한 은폐와 자기 합리화를 시도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왜 똑같이 공평하게 사랑해야 할까요?
- ‘사랑은 질투를 타고 흐른다’에서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라고 흔히들 말하지요.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무의식 뒤로 숨는 행위입니다. 정말이지 내 힘으로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 있을 수는 있지만, 내가 있는 힘을 다해 나 자신을 살펴보고 의심하지 않으면 교활한 무의식에 나 자신이,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내 아이가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 ‘아이를 사랑하지 못한 죄’에서

저의 어린 딸아이에게서도 발견되고, 성인이 된 여러 여성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어떤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지요.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라, 내가 가장 어려운 순간, 그저 나를 알아주는 ‘엄마’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 ‘상처투성이 엄마의 사랑법’에서

‘누가 아이를 더 많이 돌보느냐’처럼 물리적인 분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종일 아이에게 지쳐 있는 아내를 정서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남편의 태도이고, 종일 직장 일에 지쳐서 돌아와 조금이라도 함께 아이를 돌보려고 노력하는 남편을 알아주는 아내의 태도입니다.
- ‘아내의 태도, 남편의 태도’에서

아빠 편을 들 수도 있고 엄마 편을 들 수도 있지만, 진짜 문제는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으면 안 되도록 부부의 다툼이나 갈등에 아이들을 이용하는 것이지요. 아이들을 부추겨서 남편을 움직이려 하거나, 아내에 대한 정서적인 역할을 딸에게 떠넘기며 자신은 슬쩍 빠져나가는 남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자인 남편의 흉을 끊임없이 쏟아 놓으며 딸을 감정받이로 사용하는 엄마는 단순히 감정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딸이 훗날 남성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게 만듭니다.
- ‘남편 흉은 어떻게 딸에게 비수가 되는가’에서

엄마는 엄마의 위치를 받아들이고 그냥 엄마면 됩니다. 아빠는 아빠의 위치를 받아들이고 그냥 아빠면 됩니다. 그것은 권력자의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각자의 위치와 위계가 다르고, 각자 위치에 따른 역할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지요. 아이는 그처럼 분리된 위치와 부모의 협력 안에서 안전하게 스스로 위치를 설정하고 자신의 모습을 나름대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 ‘엄마는 엄마면 되고, 아빠는 아빠면 된다’에서

자크 라캉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 사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나도 못 받았는데, 내가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줘? 뭘 주라는 말이지?”라는 반문과 반감은 내 안에서 충분히 애도되지 못한 탓에 어느 시점에서 멈추어 버린 어린 나의 아우성에 불과합니다.
- ‘어릴 적 엄마에게 원했던 것을 주어라’에서

우리는 트라우마도, 나쁜 기억도 그것이 없었던 상태로 돌아가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품고서도 충분히 회복될 수 있습니다.
- ‘새로운 나를 만난다는 것’에서

나의 쾌락과 만족을 실현시킬 권한을 타인에게 양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삶을 탓하거나 우울해하는 것은 소모적이기만 합니다. 내 삶에 대한 애착과 애정을 만족시켜 줄 타인을 찾아 헤매기보다는 내가 나 자신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소한 루틴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입니다.
- ‘일상의 지루함을 즐기는 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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