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리뷰

두 번째 산 -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

728x90

두 번째 산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

책 읽으러 가기

책속에서

그 사람의 깊은 내면은 언제 드러나는가?
계곡에 떨어진 사람들이 경험하는 고통의 시기는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드러내며, 자신이 생각하던 모습이 사실은 진정한 자기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이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도 알지 못했던 내면이 노출되고 만다. 자기가 겉으로 내걸고 다니던 여러 모습들이 실제 자신이 아님을 비로소 알아차린다. (…)
어떤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고통에 맞닥뜨리면 움츠러든다. 이들은 평균 이상으로 더 두려워하고 분개하는 듯이 보인다. 이들은 겁에 질려 자신의 깊은 내면을 외면한다. 그리하여 인생이 갈수록 더 쪼그라들고 더 외로워진다.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 슬픔을 끌어안고 사는 노인을 주변에서 흔히 본다. 이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을 받지 못한 채, 오래전 자신에게 일어난 어떤 잘못된 일을 놓고 끊임없이 화를 내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계곡이 자기 발견과 성장의 계기가 된다. 고통의 시절은 일상이 피상적으로만 흘러가는 것을 방해해서, 자신의 좀 더 깊은 내면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자기 기질 깊숙한 곳에 보살핌의 본질적인 어떤 능력, 즉 자아를 초월해서 타인을 보살피고자 하는 어떤 열망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 열망에 맞닥뜨릴 때 이 사람들은 전인적인 인간(whole person)이 될 준비가 완료된 상태이다. 이들은 익숙한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마침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것도 단지 구호로서가 아니라 현실 속 실천으로. 사람들의 인생은 가장 큰 역경의 순간에 자기가 대응한 방식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규정된다.

지금 몇 번째 산을 오르고 있는지 알려면
자신이 지금 첫 번째 산을 오르고 있는지 아니면 두 번째 산을 오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결정적인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궁극적으로 소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 내면에 있는 자아인가, 아니면 당신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인가?
첫 번째 산이 자아(ego)를 세우고 자기(self)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자아를 버리고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첫 번째 산이 무언가를 획득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무언가를 남에게 주는 것이다. 첫 번째 산이 계층 상승의 엘리트적인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무언가 부족한 사람들 사이에 자기 자신을 단단히 뿌리내리고 그들과 손잡고 나란히 걷는 평등주의적인 것이다.
두 번째 산을 오르는 방식은 첫 번째 산을 오르는 방식과 전혀 다르다. 첫 번째 산은 정복한다. ‘나’가 이 산을 정복하는 것이다. 정상이 어디인지 멀리서 확인하고는 그곳을 향해 기를 쓰고 올라간다. 그런데 두 번째 산은 다르다. 두 번째 산이 ‘나’를 정복한다. 나는 어떤 소명에 굴복한다. 그리고 그 소명에 응답해, 내 앞에 놓여 있는 어떤 부당함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다한다. 첫 번째 산에서는 야심을 품고 전략적으로 접근하며 독립심을 발휘하지만, 두 번째 산에서는 인간관계를 중시하고 친밀하며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태도로 일관한다.

경험을 쌓는다고 인생이 달라질 수 있는가?
심미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추구하면 하루하루가 즐겁긴 하겠지만, 무언가가 의미 있게 축적되지는 않는다. 이런 삶을 뒷받침하는 이론은, 사람은 최대한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일련의 연속적인 모험으로만 살아간다면, 스쳐 지나가는 감정들과 쉽게 바뀌는 열정이라는 불확정성 속에서 정처 없이 배회하는 꼴이 되고 만다. 이럴 경우 이 사람의 인생은 어떤 성취를 쌓아 가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일시적인 순간들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가 가진 힘을 무작위로 온 사방에다 흩뿌리며 낭비하는 셈이다. 그러면서 소중한 무언가를 놓쳐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끊임없이 휩싸인다. 이 사람의 가능성은 끝이 없을지 몰라도, 의사 결정 풍경은 구제 불능일 정도로 밋밋하다. (…)
인간이 가지고 있는 천성적인 열의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예”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도록 훈련시킨다. 그렇지만 당신이 어떤 것에도 영원히 “아니요”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마 어떤 것에도 깊이 빠져들지 못할 것이다. 헌신하는 인생은 소수의 소중한 “예”를 위해 수천 번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
스마트폰 시대에는 어떤 거래나 인간관계를 맺거나 깨는 데 들어가는 비용인 마찰 비용이 0에 가까워진다. 인터넷은 당신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클릭해서 시험적으로 사용해 보라고 권한다. 온라인에서 산다는 것은 흔히 전환 상태에서 사는 것을 뜻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실질적으로 어떤 것에도 깊이 몰입하지 못한다. 온라인 인생은 헌신의 결단과 몰두를 가로막는 온갖 장치들과 기기들로 가득 차 있다. 만일 당신이 30초 동안만이라도 주의를 집중할 수 없다면, 당신은 과연 어떻게 인생을 위해 무언가를 수행하고 헌신할 수 있겠는가?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두 가지 유형
텔로스telos(목적) 위기에 빠진 사람은 자기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쉽게 부서질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철학자 니체는 인생을 살아갈 ‘이유(why)’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과정(how)’이든 견딜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 목적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여정에서 만나는 온갖 고난을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기 목적을 모르는 사람은 아주 작은 고난에도 쓰러져 버린다. (…)
내 경험으로 볼 때 텔로스 위기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걷는 형태, 하나는 잠자는 형태이다. 걷는 형태에서는 고통당하는 사람이 그저 계속 터벅터벅 걷기만 한다. 이 사람은 어떤 충격을 받거나 깊은 권태감에 시달리는 상태이지만,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또는 자기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야 옳은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저 자기가 하고 있던 것을 계속 하고 있을 뿐이다. 똑같은 일거리, 똑같은 장소, 똑같은 일상, 똑같은 인생…. 이 사람은 자기가 안주하고 있다는 심리적 자각과 함께 살아간다. (…)
텔로스 위기의 두 번째 유형은 잠자는 것이다. 이 경우에 고통받는 사람은 그냥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며 넷플릭스 드라마만 본다. 이 사람의 자신감은 바닥이 났다. 이 사람은 자동 초점 설정에 의해 마비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 버렸고 자기 인생이 자기를 이미 스쳐 지나가 버렸다는 전혀 입증되지 않은 이상한 신념에 사로잡혀 있다. 다른 사람들이 거둔 성취가 그에게 실질적인 고통을 주기 시작한다. 남들의 빠른(정확하게는 빨라 보이는) 출세와 자신의 무기력한 처지 사이의 격차가 커질수록 그 고통은 더욱 깊어진다.

신은 믿지 않아도 영혼의 존재는 믿어라
의식의 또 다른 부분은 영혼이다. 당신에게 신을 믿거나 믿지 말라고 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작가이지 선교사가 아니다. 선교는 내 전공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도 영혼을 가지고 있음을 믿으라는 말은 분명히 하고 싶다. (…)
영혼은 도덕적 가치를 품고 있으며 도덕적 의무를 감당하는 당신 의식의 한 부분이다. 어떤 강이 있다. 이 강은 자기가 흘러가는 것에 대해 도덕적으로 책임지지 않는다. 호랑이도 자기가 잡아먹는 다른 동물에 대해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기가 하는 행위 또는 하지 않는 행위에 도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
영혼은 도덕 의식과 윤리 감각의 못자리이다. C. S. 루이스가 말했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나라에서건 전투 현장에서 달아난 탈영병이나 고마운 사람을 배신한 사람이 칭송받은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다. 어떤 동물이 자기장에 의지해 방향을 잡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이런 도덕 감각들에 의지해 자기 행위의 방향을 잡는다. (…)
영혼이 주로 하는 것은 동경(yearn)이다. 심장이 다른 사람 또는 어떤 대의와 하나로 녹아들기를 갈망한다면, 영혼은 올바름을 동경하고 선한 것과 하나로 녹아들기를 동경한다. 소크라테스는 인생의 목적은 자기 영혼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 즉 영혼이 동경하는 선함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모든 사람들은 선하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자 했다. 자기가 살아가는 인생에서 목적과 의미를 경험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상실감을 느낀다. 심지어 범죄자나 소시오패스조차 자기가 저지른 악행이 실은 알고 보면 선한 행위라거나 적어도 전후 사정을 고려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 행위라는 변명을 만들어 낸다. 자기가 철저하게 악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산에서는 어떤 인생을 추구하는가?
개인주의는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힘쓰라고 말하지만, 두 번째 산에 있는 사람은 인생의 의미와 도덕적 기쁨을 추구하는 데 힘을 더 쓴다. 개인주의는 독립성을 찬양하라고 말하지만, 두 번째 산에 있는 사람은 상호 의존성을 찬양한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 있는 기회를 찬양하고 그들이 자기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을 찬양한다. 개인주의는 자율성을 찬양하지만, 두 번째 산은 관계성을 찬양한다. 개인주의는 적극적인 목소리로 말하며(설교하기, 주장하기) 결코 수동적인 목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 번째 산의 반란은 귀 기울여 듣고 응답하고자 한다. 주고받는 친밀한 목소리로 소통한다.
개인주의는 세속적인 세상, 즉 커리어 선택과 세속적 성취를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에서 번성한다. 두 번째 산의 정신은, 세속적인 세상은 마법에 걸린 세상이자 도덕적, 감정적 드라마일 뿐이라고 말한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사리사욕을 용인하고 표방하지만, 두 번째 산의 정신은 사리사욕에 초점을 맞추는 세계관은 인간의 모든 진폭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리 인간은 개인적인 이기심으로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위대한 사랑의 행동을 할 수 있으며 또 이기심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잔인무도한 행동도 할 수 있다. 개인주의는 인생의 주된 행위는 사고파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두 번째 산에 있는 사람은 인생의 주된 행동은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최고 수준의 인간은 선물을 주는 사람이다.
개인주의는 자기를 먼저 사랑해야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두 번째 산의 정신은 사랑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 먼저 사랑을 받아야 하며, 또 자기가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알기 위해 다른 사람을 적극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 번째 산에서는 각자가 개인적인 선택을 하고 또 여러 선택지들을 계솔 열어둔다. 두 번째 산은 약속이 넘쳐 나는 곳이다. 여기에서는 헌신하고, 자신을 내려놓고, 자신을 던져 버리는 것이 가장 큰 관심사이다. 자기를 버리고 헌신하는 것이다.

파편화된 삶에서 통합된 삶으로 나아가려면
힐레숨처럼 완벽하게 개인적인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은 드물다. 공동체 활동가들처럼 자기를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도 드물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하나의 모범이 된다. 그들이 모범이 되는 이유는 많겠지만 하나를 꼽자면, ‘인생의 한 가지 과제는 통합이다’라는 핵심을 그들이 입증한다는 점이다. 통합이란 단일한 어떤 전망을 향해 일관되게 나아갈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의 파편 난 조각들을 모두 모아서 온전한 하나로 엮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결코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파편화된 삶을 살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낮은 수준에서만 통합을 이룬다. 그런데 힐레숨은 매우 높은 수준에서 통합을 이루었다. 인생의 외부 조건들이 극단적으로 참혹하게 바뀌어 갔지만 그녀의 내면 상태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평온해졌다.
그녀가 통합을 획득한 방식은 자기 천착이라는 끊임없는 내적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온전하게 내려놓고 또 내어 주는 외적 과정을 통해서였다.

인생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했다. 프랑클은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는 “나는 인생에서 무엇을 얻고자 해야 할까?” “나를 행복하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같은 커리어 관점의 질문은 적절한 질문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가 깨달은 진정한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인생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프랑클은 유대인 강제 수용소의 정신과 의사에게는 고통을 연구하고 또 그것을 누그러뜨릴 의무가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가 인생에서 기대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인생이 우리에게서 기대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인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멈출 필요가 있었다. 대신에 스스로를 매일 매시간 인생으로부터 질문을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의 대답은 대화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처신이어야 한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인생이 던지는 문제들에 대해 올바른 해답을 찾고 인생이 각 개인에게 끊임없이 부여하는 과제들을 수행하는 의무를 지는 것이다.”
소명 의식은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주어진 의무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에서 비롯된다. 프랑클은 강제 수용소에서 심리 치료사 일을 수행하면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세상이 여전히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들을 상기시켰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추구할 목적과 의무가 있었다.

멘토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들
멘토는 아낌없이 주는 사랑과 높은 기준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한 채 자신이 진지하게 바라보는 무언가를 위해서는 가차 없는 요구를 해댄다. 우리는 자신이 쉽고 편한 것을 바란다고 생각한다. 물론 때로는 그러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내면에는 헌신과 희생이 요구되는 어떤 소명을 갈망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
멘토는 탁월한 어떤 것을 멘티 앞에 제시함으로써 멘티에게서 겸손함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멘토는 과업에 겸손히 순종하는 법을 멘티에게 가르친다. 자연스러운 방법은 어떤 행위의 한가운데로 스스로를 던져 넣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라는 질문은 딱 한 번만 하면 좋다. 이 질문을 늘 입에 달고 다닌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야구 경기에서 어떻게 하면 공을 잘 던질지를 놓고 골몰하는 투수는 공을 잘 던질 수 없다. 공을 던져야 한다는 과업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
멘토는 또한 실수를 다루는 법을 가르친다. 경험을 많이 할수록 자기 실수를 한층 더 잘 인식하게 되고 또 이 실수를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는지 경험을 통해 이해하게 된다. 멘토는 두 번, 네 번, 열 번 원고를 고쳐 쓰는 것에 대한 감각을 멘티에게 제공한다. 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 어떤 실수든 나중에 얼마든지 바로잡을 수 있다는 믿음과 그런 실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자신감을 가지고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준다.

무엇이 나의 가장 깊은 욕구를 건드리는가?
그는 여전히 자기 인생에 귀를 기울이면서 자기 욕구들이 어떤 것인지 헤아리고 또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의 귀감이다. 내 주변에 어떤 문제들이 있을까? 내 인생이 나에게 준비시킨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이 두 가지가 나란히 손잡고 갈 수 있을까? (…)
이것은 커리어 개발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무엇이 나의 가장 깊은 욕구를 건드리는가?” 그리고 “어떤 활동이 나에게 가장 깊은 만족을 안겨 주는가?”라고 묻는다. 둘째, 이것은 딱 들어맞는 어떤 것을 찾는 문제이다. 직업과 관련된 의사 결정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크거나 가장 화려한 문제를 찾는 건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기분 좋은 활동과 사회적 필요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는 게 중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내면의 여행과 같은 것이다. 내면으로는 추락하고 바깥으로는 확장하는 것이다. 자기 안에서 다른 사람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어떤 장소를 찾는 것, 작가이자 신학자인 프레더릭 비크너가 한 유명한 말처럼, 자신의 깊은 기쁨이 이 세상의 깊은 갈망과 만나는 바로 그 지점을 찾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지금도 여전히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이 결혼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회학자들이 보기에 오늘날 결혼은 토대로 사용되는 쐐기돌보다는 장식물 기능을 가진 갓돌로 인식되고 있다. 예전에는 먼저 결혼부터 해야 좋은 커리어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자제력과 건실함을 갖춘 사람이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자기부터 먼저 자리를 잡은 다음에 결혼을 하겠다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이처럼 결혼을 바라보는 사회적인 인식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늘 그렇듯이 개인주의 관점에서 문제가 되는 한 가지는 개인이 ‘자기’라는 작은 감옥에 갇혀 버린다는 점이다. 자아실현을 좇아서 결혼한 사람은 앞으로도 계속 좌절감을 맛보게 될 것이다. 결혼 생활 그리고 특히 자녀 양육은 이 사람이 자기의 목표를 달성하는 길로 온전하게 나아가지 못하고 엉뚱한 길로 벗어나도록 끝까지 방해할 테기 때문이다.
개인주의 관점이 안고 있는 또 다른 문제는, 이것이 가장 깊은 갈망들을 충족할 명쾌한 답안을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장(heart)은 다른 사람들과 합쳐져서 하나로 녹아들길 갈망한다. 하지만 이런 일은 서로의 자율성을 합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서로가 자기를 버릴 때만 해결된다. 영혼(soul)은 어떤 이상을 좇고 기쁨을 추구하길 갈망한다. 이것은 자아를 초월해서 결혼 생활에 봉사할 때만 비로소 가능하다.

배우지 않으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시카고대학교 교수들은 우리에게 대상을 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현실의 실체를 보는 것이 간단해 보일 수도 있다. 그냥 고개를 들고 세상을 둘러보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정치권 주변에 있는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파성이라는 왜곡된 안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안의 공포와 불안과 자아도취의 필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지 모른다.
대상을 잘 보는 건 자연적으로 되지 않는다. 이것은 겸손함의 어떤 행위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서, 즉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나 자기가 바라는 것에서 온전하게 빠져나와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야 보고자 하는 대상을 자기 관심사의 반영물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상을 잘 보는 것은 실체를 선명하게 바라볼 줄 아는 다른 사람들(예컨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조지 엘리엇, 조지 오웰, 제인 제이콥스, 제임스 볼드윈, 레프 톨스토이 등)에게서 배워야 하는 하나의 기술이다.
19세기 영국의 예술평론가이자 사회사상가인 존 러스킨은 이렇게 썼다. “인간의 영혼이 이 세상에서 수행하는 가장 위대한 일은 어떤 것을 ‘보고’ 또 이렇게 ‘본’ 것을 쉽게 풀어서 말하는 것이다.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수백 명이라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이며,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수천 명이라면 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이다.”

공동체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 때
고통의 시기에는 누구나 자기 인생이 나아가는 방향을 어떻게든 바로잡아 보려고 핸들을 잡은 손에 과도하게 힘을 주기 마련이다. 그러나 때로는 패배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핸들을 놓아 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때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아닌 게 아니라 헨리 나우웬도 다음과 같이 썼다.
“자기가 받는 고통의 특수한 환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 쉽게 화를 내고 적개심을 품고 복수심에 사로잡힌다. (…) 그러나 진정한 치유는 자기의 특수한 고통이 사실은 인간 전체가 겪는 고통의 일부임을 깨닫는 데서 시작된다. (…) 자신의 고통을 유발한 외부 상황에 대해서는 관심을 멀리하고 자기가 참여하는 공동체의 고통에 관심을 집중할 수 있을 때 자기가 받는 고통을 견디기가 한결 쉬워진다.”
고통을 통해 습득하는 지식은 분명하게 표현될 수 있지만, 고통의 경로를 견뎌 내지 않은 사람은 그 지식을 결코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다. 내가 그 고통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왔을 때 나는 빈손이 아니었다. 인생이 나를 가혹하게 두들겨 팼기에 비로소 나는 무언가에 감동받기 충분할 정도로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고통은 나 자신의 가장 깊은 원천들을 열어젖혔고, 덕분에 새로운 성장이 이루어질 신선하고 건강한 토양이 드러났다.

신앙인이라면 겸손함과 중간의 목소리로 살아가라
신앙인은 겸손한 존경심을 가지고 신에게 다가가며, 공부와 기도와 영적인 훈련을 통해 티끌만 할지라도 신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이 사람은 신의 사랑이 아무리 작더라도 그것을 거스르지 않고 따르며 사는 법을 서서히 배운다. 인생을 지배하는 것은 의지로 채워진 어떤 시도가 아니며, 또한 완전한 항복과 자기 파괴도 아니다. 인생을 지배하는 것은 열정적인 반응이다. 그것은 참여, 신의 더 큰 의지에 자기의 의지를 보태는 복잡한 참여이다.
피터슨이 말하듯이, 그것은 능동적인 목소리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것이 지배이다)도 아니고 수동적인 목소리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것은 굴복이다)도 아니다. 그것은 중간의 목소리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 즉 대화와 반응이다. (…)
신앙과 은총은 주체성을 버리는 일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신앙과 은총은 주체성을 강화하고 그것에 권한을 부여하는 한편 그것을 변화시키는 일과 관련된 것이다. 은총이 넘칠 때, 은총은 우리가 바랄 더 좋은 대상들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또 그런 것들을 바랄 수 있는 더 많은 힘을 우리에게 준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예전에 가지고 있던 욕구들을 버리고서 새롭고 더 나은 일련의 욕구들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다.

공동체의 미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두 진영의 전쟁
미국 사회의 토대, 즉 국가와 시장을 비롯해 모든 것이 의존하는 신뢰와 인간관계 그리고 헌신의 망이 무너지고 있다. 이에 따른 결과는 그 어떤 전쟁 못지않게 유혈이 낭자하고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어쩌면 지금이 이런 현상을 하나의 전쟁으로 보기 시작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싶다. 한쪽 진영에는 분리와 불화와 고립을 조장하는 힘들이 있고, 다른 쪽 진영에는 애착과 연결과 연대를 강화하는 사회의 모든 힘들이 있다. 바야흐로 우리는 사회적 얼개를 찢으려는 진영과 이 얼개를 강화하려는 진영 사이의 마지막 대결전을 목격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이 전쟁에는 특별히 까다로운 점이 있다. 이것은 선량한 사람들의 집단과 사악한 사람들의 집단이 벌이는 전쟁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전쟁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두 진영에 동시에 속해 있다는 말이다. (…)
관심과 보살핌이 부족할 때 이웃이라는 집단은 쉽게 깨지고 그 구성원들 역시 파편화된다. 사람들은 여전히 예전과 다름없이 이웃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긴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흐르던 신뢰의 물길은 바짝 말라 버린다.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가깝게 의지할 사람이 별로 없다. 사람들은 다들 소속감을 갈망한다. 그러나 이 소속감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분명하지 않다. (…) 관심과 보살핌은 소원함과 불신으로 이미 대체되고 없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공동체를 복원할 수 있을까? 기본적으로는 두 번째 산에 사는 사람들,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에 의해 공동체는 복원된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는 또 다른 길
지금 세상은 전환의 순간을 통과하고 있다. 개인주의 도덕 생태계가 우리 주변에서 무너지고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벌거벗은 채로 외롭게 떨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는 본능적인 반응은 “부족으로 돌아가자(Revert to Tribe)”라는 진화론적 반응이다. 만일 우리가 사회 차원에서 “나는 자유다”의 과잉에 대해 “부족으로 돌아가자”의 시대로 대응한다면, 21세기는 유아적인 갈등과 폭력의 시대가 될 것이다.
소속감을 찾는 또 다른 길이 있다. 의미와 목적을 찾는 또 다른 길이 있다. 건강한 사회에 대한 또 다른 전망이 있다. 바로 관계주의를 통하는 길이다. 이 길은 우리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서 나 아닌 타인을 돌볼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찾아내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쪽으로 자기 존재를 확장하는 것이다. 이 선언문에서 나는 현시점의 초개인주의에 반대하고, 더 나은 삶의 방식인 관계주의를 주장하고자 한다.

'나는 자유다'라는 문화 속에서 개인들은 외로우며 서로에게서 느끼는 애착은 느슨하다. 공동체는 해체되고 개인들 사이의 결속은 끊어지며 외로움은 확산된다. 이 상황은 좋은 삶을 살아가는 것, 즉 사랑과 연결을 바라는 깊은 인간적 갈망을 채우는 것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든다. 모든 연령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지만 특히 청년들은 더 그렇다. 이들은 구조화되어 있지 않고 불확실하기만 한 세상에 던져진다. 믿고 의지할 권위나 방호책도 거의 없다. 그런 것들은 오로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자기 인생 여정에 올려놓는 일 자체가 놀라울 정도로 어렵다.

이 책을 추천한 크리에이터

이 책을 추천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