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우리 결혼생활은 ‘336타임’으로 돌아간다. 1년 중 3개월은 네덜란드에서 3개월은 한국에서 같이 지내고 나머지 6개월은 따로 지내는데 따로 있을 때는 문자 보내기가 가장 중요한 소통 방법이자 연결 고리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냐. 최대한 많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는 구호 전문가 아닌가? 안톤과 나는 구호 현장에서 쓰는 방식을 우리 관계에 적용해보기로 했다. 바로 ‘우선순위’와 ‘최소 기준’ 정하기다.
이렇게 둘 다 깔끔하고 정리 정돈을 잘하는 공통점이 있는 반면, 일상생활에서 비야와 내가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시간 관리법이다. 비야는 깨어 있는 시간에는 꿀벌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뭔가를 한다. 반면 나는 틈틈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혹은 아무 생각 없이 빈둥거리는 시간을 즐긴다.
“엄지 척!”
안톤이 한국에서 거의 처음 배운 한국말이고 너무나 유용하게 쓰는 표현이다. 이만큼 쓸모가 많은 표현이 또 있을까? ‘좋아요, 참 잘했어요, 멋져요, 마음에 쏙 들어요, 좋은 생각이에요, 대만족이에요…….’
비야가 내 인생에 들어오면서 드디어 내게도 이 성숙기가 찾아왔다. 그와 더불어 이해, 공감, 신뢰, 평화라는 성숙기의 덕목이 일상생활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비야도 마찬가지일 거다. 우리는 서서히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행동을 벗어나 ‘우리 중심적’으로 바뀌고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아침을 먹으면서 우리가 함께 지낼 수 있는 세월이 길지도 않은데 하루라도 이렇게 까먹은 건 너무 아깝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리고 만약 다시 이런 일이 생겼을 때, 반드시 지켜야 할 대원칙을 정했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날의 문제는 그날 꼭 풀고 잘 것!
일상생활에서도, 구호 현장에서도 도움받는 사람을 절망적인 대상으로 보거나 그렇게 대우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들 역시 품위 있는 인간이다. 다만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한 상태에 있을 뿐이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디서 처음 만났어요?”
수없이 받은 이 질문에 나는 묻지도 않은 정보까지 보태 답한다.
“아프가니스탄이요. 그때는 안톤이 보스였는데 지금은 내가 보스예요.”
이 한마디에 우리 사랑의 역사가 담겨 있다. 그렇다. 그와 나의 관계는 지난 18년간 다채로운 모습으로 진화, 발전했다.
이 지역 주민들이 쓰나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한번이라도 교육이나 훈련을 받았더라면, 동네마다 대피를 알리는 사이렌 확성기만 있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재난이 일어난 후에야 미디어의 관심과 구호 자금이 몰리는 게 현실이다. 나는 늘 그게 안타까웠다. 오랫동안 생각해온 이 문제는 자연스레 내 논문 주제가 되었다.
작은 이 마을은 놀랍게도 서유럽의 허브다. 벨기에까지는 고작 10킬로미터. 자전거로는 30분, 레인더 숲길 따라 천천히 걸어가도 두 시간 남짓 걸릴 뿐이다. 큰 도로 표시를 제외하면 변변한 이정표도 없어 국경이 아니라 옆 동네를 드나드는 것 같다. 독일까지는 차로 약 30분 거리로, 안톤은 한 달에 한두 번은 맥주를 사러 독일에 다녀온다.
얼마 전 우리 집 앞마당에 무궁화를 여러 그루 심고 안톤 부모님 산소 옆에도 몇 그루 심었다. 내친 김에 우리 집 앞, 뒷마당에 온갖 종류의 무궁화를 심어 아예 무궁화동산으로 만들고, 그 꽃으로 이 동네 사람들 ‘참교육’을 시켜볼까나?
용서를 청하고 용서해주는 일, 둘 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나이 들수록 이걸 잘하면 얼마나 좋을까? 연습하면 잘할 수 있을까? 안톤 말대로 사람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이니 하느님께 도움을 청해야만 하는지도 모르겠다.
흔히 결혼은 자기 반쪽을 찾는 일이라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불완전한 두 개의 반쪽이 모여서 비로소 하나의 완전체가 되는 게 아니라, 혼자로도 이미 완전체가 되어야 둘이 있어도 완전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게 이 ‘혼자 있는 힘’이 생긴 건 장기간의 오지 여행 때도 긴급구호 전문가로 일할 때도 아닌 고등학교 1학년 겨울이었다.
외부의 밧줄이란 아무리 굵고 튼튼해 보여도 조금만 상황이 달라지면 새벽안개처럼 사라지는, 참으로 믿을 수 없는 무엇이라는 걸. 기준과 호불호가 손바닥 뒤집히듯 쉽게 변하는 세상에서 믿을 건 스스로 서 있게 하는 자기 뿌리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요즘 들어 우린 틈만 나면 이 주제로 얘기를 나눈다. 둘 다 진심으로 그렇게 나이 들고 싶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수없이 많은 원칙과 전술 전략을 세웠다 고쳤다 없앴다 하고 있다. 의사들은 늘 말한다. 몸에 좋은 100가지를 하는 것보다 몸에 나쁜 한 가지를 하지 않는 게 훨씬 낫다고. 이 조언을 응용하여 최우선으로 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에 합의하고 대책을 마련해보았다.
어떤 사람은 말했다. 60대에 이르면 더 이상 똑똑해질 필요는 없지만 더 지혜로워졌음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나 자신의 우월함을 입증하려는 노력은 덜 하고 대신 내가 배운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려는 노력을 더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책을 추천한 크리에이터
이 책을 추천한 포스트
함께 걸어갈 사람이 생겼습니다('혼자'로도 충분해야 '둘'일 때 더욱 좋다)_책 읽는 다락방J(유료홍보)
책읽어주는남자 #책읽어주는라디오 #오디오북 E: hipuhaha@naver.com 오늘 소개해드릴 책은 푸른숲에서 펴낸 [함께 걸어갈 사람이 생겼습니다]입니다. 이 책을 쓴 ...
'책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50부터, 운을 내 편으로 만드는 좋은 습관 - 사토 덴 (0) | 2020.12.04 |
---|---|
인생에 가장 중요한 7인을 만나라 - 리웨이원 (0) | 2020.12.04 |
수치심의 치유 - 존브래드쇼 (0) | 2020.12.03 |
후배 하나 잘 키웠을 뿐인데 - 실비아 앤 휴렛 (0) | 2020.12.03 |
태도의 품격 - 로잔 토머스(Rosanne J. Thomas) (0) | 2020.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