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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내가 죽고 싶다고 하자 삶이 농담을 시작했다 - 김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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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고 싶다고 하자 삶이 농담을 시작했다

김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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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자해를 하다가 마침내 어느 날, 이건 수면제 때문에 죽는 게 아니라 수면제를 삼키느라 마신 물 때문에 배 터져 죽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약을 삼켰다. 점점 의식이 가물거렸다.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는 반려견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지금은 못 놀아줘, 미안. 그럼, 음, 이젠 안녕.

달리기는 뭔가 달랐다. 뭐랄까, 빵빵하게 부풀어오른 풍선에 약간 여유를 주듯이 어깨의 힘이 조금 빠지게 된다. 분하고, 화나고, 속상한 부정적인 기분들이 달리면서 뱉어내는 숨에 울분과 함께 빠져나가는 듯하다. 그전에도 우울증에 달리기가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정말 효과가 있었다. 믿으시라. 20년째 우울증과 사투하는 내가 효과가 있다고 하면 정말 있는 것이다.

가끔 그 지방들은 나를 안전하다는 기분이 들게 해줄 때도 있었다. 이를테면 원치 않는 남성들의 성적 접근에서 확실한 방어막 역할을 해줬다. 내가 패딩코트처럼 두른 지방은 마치 비계로 된 갑옷처럼 그런 일들을 막아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 남자들은 내가 살이 찌지 않았을 때는 지분거렸지만 살이 찌자 경멸하기 시작했다.

이 의사도 성의 없긴 마찬가지였다. “아프다고 이걸 마취해요? 좀만 참아봐요!” 그러더니 이걸 시술한 의사를 욕하기 시작했다. “머저리 같은 놈, 이걸 나중에 빼려면 실을 제대로 앞에 나와 있게 해놔야지, 실을 저 안에 넣어놔 가지고 실을 꺼낼 수가 없잖아. 어떤 돌팔이야!” 그러면서 “조금만 참아요” 하며 실을 찾기 위해 내 몸속을 마구 뒤지기 시작했다. 겨우 실을 빼내고 나서야 고통이 멈췄는데 마치 인간이 아니라 ‘암소’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정신이 너무나 괴로울 때 육체를 해함으로써 정신을 한눈팔게 만들었다. 흔히 정신력으로 육체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육체적 고통은 번번이 정신을 이겼다. 미쳐버릴 것 같은 우울감은 피가 흐르는 뜨끔한 통증 앞에 잠시나마 자취를 감추었다.

“뭘 하고 있어? 어서 심으라니까?” 네, 까라면 까야지요. 마담은 멀쩡한 손 뒀다가 너 지금 뭐 하니, 하고 얼굴에 궁서체 폰트 16 볼드 정도로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그러다 빈약한 지혜가 떠올라 얼른 가게에서 병맥주 따개를 가지고 나왔다. 병따개로 흙을 파자 모종삽만큼 효율이 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땅이 파이기 시작했다. 이래서 인간은 도구의 동물이었구나!

거울을 볼 때 남자의 70퍼센트는 자기 정도면 잘생겼다고 생각하고, 여자의 70프로는 자신이 뚱뚱하다고 여긴다는 농이 있다. 아는 남자 하나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장동건이나 박보검은 너무 부담스러워. 나 정도가 딱이지”라고 망언을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순진무구한 부모님이 다단계를 소개받고 이거면 돈을 벌 수 있을 줄 알고 열렬히 세일즈에 임했지만 우리 집 창고에는 자석요만 쌓이고 또 쌓였다. 우리가 살던 동네의 모든 사람에게 신게 할 수 있을 만큼의 황토 양말과, 한꺼번에 가동시키면 혹시 죽은 사람도 벌떡 일어나지 않을까 싶은 저주파 치료기 같은 것도 창고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그 물건들의 값을 누군가는 치러야 했는데, 대학을 갓 졸업한 스물다섯 살의 내가 당첨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풍산개에는 ‘개 비서’가 따로 있어서 개를 수행했는데, 이 개는 회장님의 모든 행보에 동행했다. 개는 다리가 네 개나 있으니 걸으면 될 텐데, 가장 젊은 ‘개 비서’의 역할은 송아지만 한 개가 치와와만 하기라도 한 것처럼 번쩍 안고 회장님이 가는 곳마다 함께하는 것이었다. 저러다 다리가 퇴화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었지만 회장님은 어디나 개를 부둥켜안은 비서와 함께 위풍당당하게 출입했다.

모든 에디터들이 배석한 가운데 그는 나의 이력서, 자기소개서, 샘플 원고 등을 심각한 얼굴로 한창 뒤적거리고 있었다. 내가 회의실에 들어가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자 인사를 받는 그의 표정은 무슨 산업폐기물을 보듯 혐오스러운 시선이었다. 그러더니, 그는, 내가 준비해간 서류들을 공중에, 휙, 하고 죄다 화려하게 날려버렸다! 아니, 이건 뭐지?!

목사였던 아버지는 교인들을 지도하기 위한 역량에 필요하다며 상담심리를 전공했고, 만만치 않던 대학원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암보험을 깼다. 모든 것은 주님이 알아서 채워주신다며 암보험을 깬 다음, 암으로 돌아가셨으니 웃을 수도 없고 그저 기만 막혔다.

부모님 주머니로 한 번 들어간 돈이 나한테 도로 들어오는 꼴을 본 적이 없는데 내가 뭘 기대했냐, 흐하하. 나는 아무도 없어 을씨년스러운 집 앞 놀이터에서 발을 힘차게 굴러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것으로 그 돈을 벌기 위해 회사에서 삼켰던 온갖 쓴맛을 꿀꺽 삼켜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아버지라는 한 남자가 엄마와 나의 인생에서 나간 대신 다른 남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것도 날이면 날마다. 그는 용역깡패였다.

해마다 내 생일이 돌아오면 아예 습관이 붙어 내 생일을 축하하기보다 늘 해왔던 대로 부모님께 근사한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대신 두 배로 어머니께 호사를 누리게 해드리려 애쓰는 중이다. 어린 시절 초도 못 꽂아보고 두 개나 뭉개져버린 케이크들의 기억은 슬펐지만 내가 일찌감치 돈을 벌게 되어 호기롭게 두 분께 비싼 밥을 사드릴 수 있었던 시간은 아버지와 빨리 헤어져야 했던 내게는, 어떤 축복이었던 것 같다.

내가 나쁜 직원인 만큼은 아니었지만, 보스도 대단히 훌륭하고 고귀한 상사는 아니었다. 그는 분노조절장애를 가지고 있었는데, ‘형님들’ 앞에서는 그 분노가 신기하게도 잘 조절되었다. 주부 사원과 수위가 약한 언쟁을 벌인 다음 그녀가 사무실을 나가자 거기다 핸드폰을 집어 던지는 걸 보고 나는 여기서 얼른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족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피가 섞이지 않았더라도 가족이 될 수 있다고 나도 이제는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가족에게 가장 많이 위로를 얻는 것은 냉엄한 세상 속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나를 조건 없이 사랑하고 받아들여주는 집단이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언니와 형부는 정말로 내겐 가족이다.

바다 사나이는 아무 말 없이 〈니드 포 스피드〉 같은 컴퓨터 레이싱 게임을 현실 로 구현한 것처럼 한껏 속도를 내 험한 길을 돌파했다. 나는 바다 사나이의 무게 있는 침묵에 감탄하여 나도 마도로스의 아내가 되면 어떨까, 하는 망상에 빠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바다 사나이에게는 그림으로 그린 듯 행복한 가정이 이미 있으니 불륜과 막장의 일일드라마를 찍는 일이 없도록 얌전히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나는 간절히 바란다. 그녀가 부디 술 끊고 돈 아껴서 저금한 돈으로 이제는 엄마와 살게 되어 이 찌그러진 가구를 버리고 떠났기를. 그리하여 ‘방’이 아닌 ‘집’에서 새 생활을 시작했기를. 그 예쁜 집에 살면서 예뻐졌기를. 그리고, 지친 청춘 모두에게도 다들 머리 누일 곳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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