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리뷰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 김이듬

728x90

안녕, 나의 작은 테이블이여

김이듬

책 읽으러 가기

책속에서

책방에 오는 주민들에게 선뜻 시인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나는 손님들에게 나를 ‘책방 언니’라고 소개한다. 편의점에 가도 “책방 언니 오셨네. 이거 먹고 힘내요” 그러면서 유통기한이 막 지난 삼각김밥이나 에그 샌드위치, 우유 등을 챙겨준다. 나는 작품을 쓰는 깊은 밤이나 새벽에 시인으로 변신하기 때문에 사사롭게 뭐라고 불려도 자존감에 상처받지 않는다. “어이, 이봐요. 손님이 왕이잖아. 커피 리필은 기본 아니야?” 그러는 분께 여기서는 다 평등하다고 말씀드린다. ― 「하필이면 코로나라서」 中

좋았던 친구 C야, 난 네가 모르는 이 장소에서 천 일 넘게 보냈지만, 시간의 끊임없는 소실만은 아니었다고 속삭이고 싶다. 또 다른 나의 발생, 또 다른 나의 실패, 또 다른 나의 이행을 실험한 것도 같지만…… 영원히 입술을 닫을 이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말처럼 나는 네게 말한다. (너는 시인은 시로써 말해야 한다고 하겠지. 나는 반의 반쪽짜리 시인이어도 좋아) 비로소 나는 너를 기다리지 않게 되었어. 그렇더라고, 우정은 자발성과 해방의 성격을 지니니까. ― 「머묾 혹은 머뭇거림에 관하여」 中

책방지기에 앞서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발각과 응징의 칼을 가는 시간에 글을 읽겠습니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석 달 전에 희귀본 몇 권을 도둑맞은 이후에 CCTV를 달까 고민했어요. 또 그런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혼자서 운영하는 독립 책방이라 한밤중의 신변 보호 차 설치한 것이어서 평소엔 돌려보지 않습니다. 괴로웠던 낮이 지나고 저녁이 왔어요. 자명한 낮을 찾다가 아름다운 저녁과 밤을 잃어버리는 이는 되지 않으려고 해요. 마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도둑을 놓아드립니다」 中

‘바르다’는 브뤼셀 출신의 영화감독 이름이기도 하다. 아그네스 바르다는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라는 단편영화에서 무언가를 줍는 행위와 그 대상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나는 지금 무엇인가를 줍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이삭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삭은 농작물을 거두고 난 뒤, 흘렸거나 빠트린 낟알, 과일, 나물을 이르는 말이다. 그것은 소용없는 것, 뒤처진 것, 모자람이 있는 것, 쓰임이 다한 것들이다. 잡동사니, 쓰레기라고 치부되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이삭을 줍는다는 것은 버려진 것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어쩌면 삶의 바른 자세는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줍는’ 태도가 아닐까?
― 「가을에는 이리저리 불안스레 주울 것입니다」 中

나는 시를 지으면서 숲을 나무뿌리를 벤치에 떨어진 낙엽을 내 마음대로 왜곡하며 해석했다. 나무는 나무가 되려는 것인데, 마치 벌목공처럼 언어의 칼로 재단했다. 내 식으로 끌어들여 해석했다. 무심하게 보지 않았다. 무생물에 생명을 환기하거나 사라져버린 작은 길을 작품에 복원하기는커녕 그 반대였던 적도 많다. 김수영이나 프랑시스 퐁주가 말한 ‘사물의 편에서’ 글을 쓴다는 것을 실행할 나이도 되었건만, 나는 사물을 ‘자기 동화’라는 말로 멋대로 훼손하는 것이다. 주위의 사물들이 어둠에 묻히는 시각, 내가 만지고 있는 이 차가운 상수리나무는 예술에 있기보다 자연에 있어야 한다.
― 「나는 만추 저녁 공원의 황량함을 사랑한다」 中

그날 이후, 우리는 바다를 바다라고 부르는 데 주저했고 수학여행을 죽음의 동의어로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랑하는 친구를 잃었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아이를 잃었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국민 모두가 한꺼번에 침몰한 상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유령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얼마 전에 발생한 강릉 펜션 사고 후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시는 복수의 장르는 아닐지라도 분노하는 것. 정답을 제시할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대답하려고 애쓰는 것. 나아가 이 세계를 자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감정이 아닐까?
― 「대답하려고 애써주세요」 中

이 책을 추천한 크리에이터

이 책을 추천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