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질문
조정래
대한민국 근현대 삼부작'인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으로 1천 5백만 독자들에게 우리 역사의 참모습을 소설로 알린 조정래 작가의 장편소설. 장편소설 <정글만리>(전3권)와 <풀꽃도 꽃이다>(전2권)를 3년 간격으로 발표한 작가가 어김없이 3년 만에 발표하는 이 작품은, 1970년 등단 이후 49년 동안 줄곧 그래왔듯이 매일 11시간을 집필에 몰두한 결과물이다. 작가는 자신의 이름이 인쇄된 원고지에 펜으로 힘 있게 써내려서 원고지 3,612매를 완성했는데, 메모와 그림으로 채워진 취재노트만도 130여 권에 이른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수천 년에 거쳐 하나의 거대한 집단, 즉 국가에 소속되어 살아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되물었을 법한 질문인 '국민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기본적이고도 치열한 질문에 대한 뜨거운 응답을 던진다. 국가의 정체를 밝히고자 한 동서양의 연구서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관점에서 국가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직접 만나 심층적으로 취재함으로써 21세기 국가에 대한 각자의 입장을 다각도로 조명하고자 했다.
소설은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에서 자본과 권력에 휘말려 욕망을 키워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월급 통장에 매달 '0원'을 찍으며 사건 취재에 고군분투하는 기자의 노력,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동료들이 낙엽 떨어지듯 일자리를 잃자 자신이 낳은 두 아이의 눈빛까지 무서워졌다는 만년 시간강사의 고뇌가 술회되는 동시에, 비자금 장부의 행방을 추적하는 재벌 그룹 구성원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그려진다.
책속에서
장우진은 고석민의 말꼬리에서 문득 물기를 느꼈다. 생활 여건에 무슨 어려움이 생긴 것인가……, 그의 머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떠돌이 시간강사 생활 12~13년……, 그 생활의 고달픔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런 섬뜩한 말까지 입에 올릴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늘 “그냥 견딜 만해요” 하며 얼버무리고는 했었다. 그 얼버무림에는 “집사람이 좀 버니까요” 하는 말이 담겨 있었다.
―「내일의 대화」 중에서
장우진은 ‘집에 무슨 일 있는 건가?’ 하는 말이 혀끝까지 밀려 나왔지만 위아랫입술을 입안으로 꾹 맞물었다. 어차피 술집이 멀지 않았고, 그런 무거운 이야기는 노상에서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도시의 빌딩들은 새로 생기는 것일수록 거대하고 우람하고 호화스러워졌다. 크기와 높이와 치장미를 다투듯 하고 있는 빌딩들은 내가 얼마나 부자인지 보라며 저마다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서울 도심의 대로상의 땅값이 평당 2~3억씩 호가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그 비싼 땅 수백 평씩을 깔고 앉은 대형 빌딩들의 값이 얼마일 것인가. 그런데 서울 시내에 어지럼증 일으킬 만큼 드높은 빌딩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결국 서울 시내 대로들은 부자들이 노골적으로 부를 과시하는 부의 향연장이었던 것이다. 이 나라 부의 60퍼센트 이상이 서울에 몰려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처럼.
‘20억 얘기를 규원이한테 하면 뭐라고 할까……?’ 퍼뜩 머리를 스친 생각이었다. 그때 잇따라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중고등학생 몇십 명에게 물었다. ‘만약 10억이 생긴다면 1~2년 감옥살이해도 상관없다.’ 이 도발적인 설문에 90퍼센트 이상이 ‘그렇다’에 응답했다. 도발적인 설문에 더 도발적인 응답에 세상은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었다. 아무리 돈, 돈 하며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라지만 애들까지 어찌 그리됐느냐는 우려고 한숨이었다. 그러나 어른은 아이들의 거울이라고 했다. 어른들이 벌써 TV 화면에서 그런 행태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어느 TV에서 젊은 여성들 300명을 모아놓고 비밀 전자 투표를 하는 게임이었다. ‘애인은 가난한데, 10억을 가진 남자가 나타났다. 애인을 바꿀 것인가?’ 다음 순간 자막에 숫자가 나타났다. 210. 그리고 ‘우와아아……’ 하는 여자들의 놀란 외침이 공개홀을 가득 채웠다.
―「인맥 포위망」 중에서
두 가지 다 10억이었는데, 아들은 20억 질문을 받고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이런 엉뚱한 생각까지 하고 있는 자신에게 이유영은 신음했다. 20억의 접착력은 끈덕지게 의식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윤현기의 손을 두 손으로 받쳐 잡은 사장은 허리가 반으로 접히도록 깊게 인사했다.
―「세상의 빛과 어둠」 중에서
좀 과한 듯한 상대의 그런 태도가 겸손도 아니고, 국회의원에 대한 존경은 더욱 아니라는 것을 윤현기는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건 사태의 급박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여기서 시간을 너무 오래 보냈습니다.” 윤현기는 무게 잡히게 누른 목소리로 잘라 말했고, “아 예, 알겠습니다. 정 상무한테 사정 다 들으셨으니 저는 결론만 딱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장이 기민하게 대응하며 입술을 훔쳤다.
“그 일만 확실하게 해결해 주시면……, 저희가 의원님을 확실하게 모시겠습니다.”
사장은 짧은 말을 하면서 ‘확실하게’를 두 번이나 반복했다.
윤현기는 그 ‘확실하게’를 곱씹어보았지만 ‘확실한 것’은 없고 ‘불확실’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건 언제나 하나 마나 한 소리일 뿐이었다.
“글쎄에에……, 확실하게라…….”
느릿하고 묵직한 윤현기의 중얼거림은 ‘이 새끼야, 어물거리지 말고 확실하게 말해’ 하며 상대방의 면상을 후려치는 주먹질이었다.
“간택이라 하셨습니까?” 장우진이 의아스럽게 물었고, “예, 우리 대학 동창들은 다 그렇게 부릅니다. 옛날 궁중에서 그랬듯이 대재벌 기업 성화가 우리 상대로 사윗감 헌팅에 나섰으니까요. 예, 우리는 헌팅이라고도 불렀어요. 상대생들 분위기는 묘했어요. 뒤숭숭한 속에 약간 긴장한 것도 같고, 약간 흥분한 것도 같고, 대기업의 그런 행위를 비판적으로 보는 학생은 얼마 안 됐고, 학교 측도 은근히 좋아하는 분위기였어요. 그야 당연한 일이죠. 자기네 학생 중에서 대기업 사윗감이 뽑히면 대기업의 학교 지원이 그만큼 후해질 테니까요. 그때 저도 그게 좋을지 어떨지 갈피를 잡지 못했어요. 어쩌면 뽑히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죠. 결국 김태범이가 뽑혔는데, 그게 불행의 길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뒤, 10년도 더 지난 다음이었어요.” 서원섭은 착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더불어 어깨동무 길」 중에서
“불행의 길……, 그게 눈으로 확실하게 확인이 됐습니까?”
“예, 술을 마시면 사람이 폭군처럼 변하고는 했어요. 전혀 딴사람으로.”
“폭군이요……?”
배상일은 눈앞에 나열된 수많은 동그라미에 또 정신이 어질어질해졌다. 그는 다시 속입술을 깨물며 오른쪽 맨끝의 동그라미에 검지 끝을 댔다. 그리고 하나씩 짚어나가면서 세기 시작했다.
―「거대한 탐욕의 탑」 중에서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억!’
동그라미 여덟 개 더하기 1.
배상일은 숨을 몰아쉬며 수표를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그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수표가 넘어갈 때마다 손 떨림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마지막 서른 장째를 넘길 때 그의 손은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어때, 맞지?” 상무가 양복을 꿰입으면서 물었고, “예에……, 마, 맞습니다.” 배상일의 잠긴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됐어. 이제 자네가 대!”
상무의 강한 어투는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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