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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 김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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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

김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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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소리도 좀 질렀어요. 그럴 땐 페달도 좀 더 힘차게 굴렸고요. 타닥타닥 더 거세게 휘날리는 비옷 자락에 기어이 여기까지 따라온 정리되지 않은 사랑의 감정도, 짐스러운 기대도, 잘해내야만 한다는 압박도, 구질구질한 책임감도 모두 후드득 떨어져 나갔어요. 그 자리엔 행복이 빵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죠. 얼마나 다행인지요. 행복이 이토록 쉬워서. 이 정도로 쉽게 행복해지는 인간이 바로 저라서.

열차에서 내렸더니 바로 옆이 바다였어. 목적지가 없었지만, 바다가 보인다면 순식간에 목적지는 바다가 되지. 당연히 선배와 정미의 반응이 빨랐어. 순식간에 “와! 바다다!” 소리를 치며 다가가더니 또 잠시 후엔 왼쪽의 언덕을 보고 “우리 저기 가서 앉을까?” 그러더라고. 나는 한발 뒤에서 그들의 즉흥 계획에 충실히 발맞췄어. 그런데도 내게 어떤 불안감이나 의무감도 달라붙지 않더라. 말한 것처럼, 아무 계획도 없었으니까.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솜털 하나하나에 달라붙는 듯한 일본 특유의 숨 막히는 습기가 없는 4월 말의 화창하고 바람 선선한 이국의 바닷가였으니까.

밤의 곤돌라라니. 그 섬세한 순간이라니. 그 떨림 가득한 감정이라니. 그 한순간을 만나기 위해 그 비싼 티켓을 사고, 그 고생을 해가며 여행을 떠난 걸지도 몰라. 그 한순간만으로도 여행의 의미는 다 충족되고도 남아.
물론 그 순간이 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도대체 어떤 소용이냐고 묻는다면 입을 다물게 되지. 하지만 이미 경험한 사람의 별은 아무나 훔쳐 갈 수 없어. 그 별은 누구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는 너만의 별. 여행자라면 누구나 이마에 박고 살아가는 자신만의 별.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도 이마엔 자신만의 별이 박혀 있단다. 사막의 밤이, 파리 뒷골목이, 제주도 새벽의 들판 풍경이, 길모퉁이 평범한 카페에서 들은 음악 한 줄기가, 그림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흘린 눈물이 별이 되어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 거지. 평생 떨어지지 않을 거야. 이렇게 별이 되어버렸으니. 나의 별은 파리 퐁피두 센터에 있었는데, 너의 별은 밤의 베네치아에 있었구나.

고맙습니다.
이 한마디가 또 이렇게 길어져버렸네요. 당신이라면 이 긴 대답을 다 이해해줄 것만 같았어요. 제가 writer의 마음을 결코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당신도 서점의 영혼을 버리지 못하고 있잖아요. 그 모든 귀찮은 질문에도 불구하고 서점의 간판을 고집하고 있잖아요. 사장님 앞에서 writer라고 저를 소개한 것이 이쯤 되면 운명으로 여겨지기까지 하네요. 마법 같은 일이 우리에겐 일어나는 법이죠. 여행 중에는 좀 더 자주 일어나고요. 우리가 여행자의 영혼을 데리고 다니니 말이에요. 기꺼이 탄복하고, 사소한 물음도 오래 곱씹고, 매 순간 진심인 여행자의 영혼 말이에요. 오늘부터 저는 작가의 영혼도 같이 데리고 다니게 되었어요. 이 영혼을 어떻게 자라게 할지는 제 몫이겠죠.

단테 서점 이야기를 자주하게 될 것 같아요.
누구보다 저 자신에게.

지금 창밖은 온통 푸른색입니다. 푸른 안개가 리베이라 지구 특유의 색감들을 모두 장악해버렸죠. 빨간색도 노란색도 초록색도 지금은 숨죽이고 있어요. 점점 하늘은 분홍색으로 바뀌어가는 중입니다. 그 색에 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도시의 조명이 하나둘 켜지고 있어요. 곧 사람들은 푸른 안개의 흔적을 잊고 그 노란 조명 아래 모이기 시작하겠죠. 그 조명 아래에서 이 도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탄하기 시작하겠죠. 어떤 순간에라도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도시니까요.
까만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되면 이제 강가는 새들의 몫이에요. 수많은 새들이 강 위를 날고, 물 위를 휘젓고, 수면을 탁탁 치며 기이한 리듬을 만들어내죠. 저는 이른 아침부터 창문을 활짝 열어둘 거예요. 그 소리를 들으며 전날의 안개 따위는 나 몰라라 말갛게 갠 리베이라 지구의 얼굴을 또 넋 놓고 바라보겠죠. 잠깐 등을 돌리면 사라질 얼굴이라도 되는 것처럼, 로션 하나를 바를 때에도 그 창문 앞에 서겠죠.
밤에도, 새벽에도, 아침에도, 오후에도, 비가 올 때에도, 안개가 낄 때에도, 흐릴 때에도, 저녁 무렵 불이 켜지기 시작할 때에도 내내 그곳에 서 있을 거예요. 덕분에 저에게는 너무나도 다양한 포르투의 얼굴이 남겠죠.

잠깐의 대화가 이어지다가도 모두 다 바다를 바라보았어요. 모두 저마다의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갔죠. 내 생각이 도착한 바다는 고3 때의 해운대였고요. 원하던 대학에서 떨어진 후 마음이 끝도 없이 추락할 때면 혼자서 겨울 해운대 바닷가로 갔거든요. 뭘 한 것도 아니야. 그냥 모래사장에 가만히 앉아서 계속 바다만 보다가 돌아왔어요. 몇 번이나 그랬는지 몰라요.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지. 사람의 부드러운 위로가 아니라 거칠고 명징한 바다의 위로가 필요하다는 걸. 아무도 없는 겨울 해운대라면 그런 위로를 해줄 수 있다는 걸.
근데 이상하게 오늘의 나에게도 이 바다는 위안이 되었어요. 한참을 바라보며 와인을 마시는데 단단하게 맺혀 있던 마음 한구석이 파도에 스르르 녹는 기분이 드는 거예요. 억울하지도 슬프지도 않았는데도 위안이 되다니. 다 괜찮다며 등을 크게 쓰다듬어주는 위로가 되다니. 참 신기하죠? 바다란 정말. 거기에 햇살과 와인과 치즈까지. 그들이 힘을 합쳐 나를 구조한 덕분에 체팔루는 그 순간 나에게 천국이 되었어요. 이곳이 천국이 아니라면 지상에서 나는 다른 천국을 찾을 자신이 없을 만큼.

문득 기억이 간절해지는 시간이 찾아오면 다시 또 펜을 들자. 편지를 쓰는 거지. 여행을 사랑하는 너에게. 아무래도 여행만은 포기할 수 없는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가장 좋았던 순간을 가장 다정한 방식으로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그 순간의 오롯한 진심을 고이 접어 고스란히 당신 손에 쥐여주고, 과거의 따스한 온기 앞에 지금의 저를 데려다 놓고 싶었어요. 그곳의 공기와 햇살과 바람과 미소와 나무를 잊지 않도록. 여행이 사라진 시간에도 우리의 여행이 계속되도록. 편지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어요. 부풀어 오른 마음도, 절박한 마음도, 그리운 마음도, 전하지 못할 것 같은 마음도 편지에는 빼곡하게 담을 수 있으니까요.

기억에 남는 문구

보장된 행복,
그것은 특정 음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함께 있는 사람과의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