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사람 중에 “나는 솔직해서 그렇다.”라고 스스로를 변호하는 사람이 많다. 솔직한 것과 남에게 기분 나쁜 말을 하는 건 다른데, 자신은 솔직하기 때문에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는 식은 곤란하다. 남이 기분 나쁜 말을 솔직하게 하느니, ‘하얀 거짓말’로 상대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편이 훨씬 낫다. 그걸 거짓말쟁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모두 서로를 띄워주면서 살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하다는 핑계로 상대를 기분 나쁘게 만드는 건 안 될 일이다. 내가 솔직하다는 핑계가 남을 기분 나쁘게 할 수 있는 권리가 되지는 않는다.
무례한 자들에게는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앞서 소개한 김영민 교수의 칼럼을 통해서 그런 상황에 대한 대처법을 만들어본다. 그들의 공격을 ‘겉돌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공격을 겉돌게 만드는 것이다. 최고의 대처법은 ‘반사’다. 상대의 말을 그대로 질문으로 되돌려준다. 그러면 돌을 던진 사람이 부끄러워진다. 작정하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을 그대로 반사해주자. “머리는 폼으로 달고 다니나?”라고 물으면 “머리가 폼이라뇨? 그게 무슨 뜻이죠?”라고 그대로 반사해주자. “참 센스가 없구나.”라고 말하면 “센스가 없는 게 어떤 거죠?”라고 그대로 반사해주자. 이럴 때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이야기하면 더 효과적이다. 상사에게 달려드는 못된 부하로 더 찍히느니, 차라리 조금 모자란 듯 다시 ‘반사’를 해버리는 게 낫다.
한 가지 분명한 건,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독설을 날리는 건, 그들의 삶이 불행하기 때문이다.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어서 자신의 불행을 희석시켜 보고자 함이랄까? 미국에서 어떤 티켓을 사면서 진상을 부리며 화를 내는 사람이 있었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이가 한마디 조용히 했다. “He is angry with his life.” 그랬다. 진상은 자신의 삶에 화가 난 것이다. 자신의 삶에 화가 난 걸 남에게 전가시키려 진상을 부린다. 우리는 거기에 맞서 싸울 필요는 없다. ‘반사’와 ‘반복’으로 충분하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음을 얻는 관문은 바로 ‘말’이다. 사업이나 비즈니스에 있어서도 마음을 얻어야 일이 성사된다. 마음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는 서로 신뢰할 수가 없다. 드라마 <상도>에서도 장사에 대해서 이런 명대사를 남겼다. “장사가 뭔지 아나?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게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거다. 나는 지금껏 돈을 번 게 아니라 사람을 번 것이다.” 장사는 이문을 남기는 게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거다. 이문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겨야 장사도 되고 사업도 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이성적인 ‘합리’뿐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정리’가 중요한 문화에서는 더 그렇다.
자아도취형이 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이 있다고 한다. 첫째, 자기중심적인 과장된 사고관이다. 우주는 자신을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한다. 둘째, 권력이나 성공이나 아름다움이나 똑똑함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특히 자신에 대해서. 셋째, 타인에 대한 과도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즉 타인이 자신에게 무조건 동조할 거라는 착각을 가지고 있다. 넷째, 자신의 성취에 대해서는 과대평가를 한다. 다섯째, 남들로부터의 지속적인 인정과 찬미를 갈구한다. 자기 자랑 대마왕에 대한 대처법 중 하나는 ‘자랑에는 칭찬으로 대응’이라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상대가 자랑을 시작하면 ‘기회는 바로 이때다.’ 하고 적극적으로 그 사람을 칭찬한다. “김변, 대단하네. 언제 여기 친구들 상담 좀 해드려.” “박회계사, 역시 천재적이야. 이거 계산 맞나 봐줘.” 칭찬 몇 마디로 상대의 자랑이 가진 의미를 증폭시켜주는 경험은 ‘선善’을 베푸는 것이다.
사과를 할 때 고개 숙이는 방향이 틀려도 진정성 있는 사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청와대 참모가 뭔가 잘못해서 카메라 앞에서 대국민 사과를 할 때 “대통령님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라고 하면 고개 숙이는 방향이 틀린 것이다. 국민에게 사과를 해야지 대통령에게 사과를 하는 모습은 자리에만 연연하는 비겁한 아전으로밖에 안 보인다. 사과를 하면서 상대에게 원인을 돌리는 것도 ‘노’다. “나는 그런 의도가 없었는데, 그렇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어.”라고 하는 건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거다. 그렇게 받아들일 줄 몰랐다면 몰랐던 잘못이 있는 거고, 알면서도 상대에게 피해를 줬다면 그것도 나쁜 거다. 사과를 할 때는 무조건 자신의 잘못에 집중해야 한다. 연애도 사과도 타이밍이 관건이다. 사랑 고백만큼이나 사과의 타이밍도 중요하다. 사과할 시점이 중요하다. 뒤늦은 사과는 뒷북치기가 되어서 의미가 퇴색된다.
스웨덴 사람들에게는 ‘얀테의 법칙Jantelagen’이라는 것이 있다. 얀테는 덴마크 출신 노르웨이 작가인 산데모제가 1933년에 발표한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의 마을 이름이다. 이 마을에서는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것은 잘난 게 아니라 이상한 것이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 살려면 지켜야 하는 다음과 같은 10가지 원칙이 있는데, 그게 얀테의 법칙이라고 한다.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만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마라. 당신이 남들보다 더 낫다고 스스로 확신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모든 것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은 남들을 비웃지 마라. 누구도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에게 무엇이든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예전에 레이건 대통령이 재선에 출마했을 때 나이가 73세였다. 56세라는 젊은 나이의 상대 후보 먼데일 전 부통령은 TV 토론에서 레이건의 고령을 트집 잡았다. 그러자 레이건은 “나는 후보의 나이를 문제 삼고 싶지 않다. 이에 먼데일 후보의 ‘젊음’과 ‘무경험’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유머로 역공했다. 정책 대신 대통령의 나이를 문제 삼은 먼데일은 자기 출신 주를 제외한 나머지4 9개 주에서 완패했다. 우리나라 정치에서도 ‘죽자고 덤비는’ 살벌한 설화 말고, 유머가 섞인 품격 있는 비판을 더 많이 보고 싶다. 유머로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여유가 없을 때, 죽기 살기가 된다. 그리고 웃자고 한 이야기에 죽자고 달려들게 되는 것이다. “개그를 다큐로 받는다.”는 말은 유머감각이 없는 반응에 붙이는 말이다. 우리 정치에서도 살벌한 말의 폭력이 좀 사라졌으면 좋겠다.
글을 잘못 써서 화를 당하는 것은 ‘필화,’ 혀를 잘못 놀려서 화를 당하는 것은 ‘설화’다. 말을 잘 못해서 실수가 되기도 하고, 안해도 될 말을 해서 쓸데없이 여론의 분노를 사기도 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해야 할 말은 안 하고, 안 해도 될 말은 해서 사회적 혼란을 초래한 사례는 많다. 본심과는 다른 말이 실수로 튀어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마음속에 있던 본심이 튀어 나와서 설화로 번지기도 한다. 공직자의 말실수는 한번 엎질러진 물처럼 되담을 길이 없다. 그 말은 없었던 걸로 해달라고 할 수도 없다. 공인의 말실수는 대중 매체를 통해서 급속도로 전달되면서 파장이 커진다. 전후좌우 상황을 다 떼어내고, 그 자체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돼버린다. 공인일수록 자신이 하는 모든 말은 조심해야 한다. 일만 잘하면 되지, 말 한마디 가지고 사람을 매도해서야 되겠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중의 인식은 냉정하다.
대화에는 사람의 성품이 생각보다 많이 묻어난다. 배려를 하는 성품인지, 남을 까기 위해서 안달인 질투의 화신인지, 대화를 해보면 다 알게 된다. 뱉은 말로 결정된 호감과 비호감의 인상은 바꾸기 쉽지 않다. 이런 인상이 한번 결정되면 인간관계에서 많은 손해를 볼 수도 있다. “누구 누구는 만나고 싶지 않은데…”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대화를 한 후에 상대하기 싫은 사람과 좋은 사람을 금방 직감한다. 감정은 상호작용적으로 나타난다. ‘이 사람 뭐야?’라는 느낌은 직관적으로 만들어진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거나,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말투는 단순한 습관이 아니다. 내 인생을 바꾸는 삶의 무기다. 말투 때문에 주변에서 도움이 답지하기도 하고, 말투 때문에 모임에서 ‘아웃’되기도 한다. 비호감 말투 때문에 정 떨어지는 비호감 인물이 되면 그냥 자기 손해다. 그 사람, 좀 이상한데?’라고 느끼면 대부분 그렇게 느끼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상함’의 출발은 말투와 태도다.
인간관계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은 ‘윈-윈win-win’ 관계라고 한다. 서로 도움이 되고 에너지를 올려주고 합심해서 더 좋은 일을 만들어내는 관계다. 부부관계가 이렇게 윈-윈이 되면 제일 좋을 것이다. 그 반대는 ‘루즈-루즈lose-lose’ 관계로, 서로 제살 깎아먹는 최악의 관계다. ‘윈-루즈win-lose’ 관계도 있는데 자신이 우위에서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루즈-윈’ 관계도 있다. 대부분 집안에서 아내들이 남편의 못됨을 참으면서 받아주는 관계를 ‘루즈-윈’이라고 할 수 있다.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 남편의 못된 말을 꾹꾹 참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평생 ‘루즈-윈’으로 지내기는 힘들다. 어느 날 빵 터진다. 그러면 상대방은 “갑자기 왜 저러지?” 하면서 이유를 모른다. 자신의 못된 말 때문에 쌓인 게 터졌다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 한다. 그러면서 부인의 ‘이유 없는 히스테리’에 당황한다. 이유 없는 히스테리는 없다. 꾹꾹 참고 쌓인 것이 터졌을 뿐이다.
높은 위치에 올라갈수록 말을 더 밉게 하게 되는 건 왜 그럴까? 권력을 가질수록 ‘터널 비전’이 생긴다고 한다. 터널속으로 들어갔을 때 터널 안만 보이고 터널 밖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주변을 보지 못한 채 시야가 극도로 좁아지는 현상을 뜻한다. 권력의 속성 때문에 ‘터널 비전’은 자주 나타난다. 아일랜드 트리니티칼리지의 뇌·신경 심리학자인 이안 로버트슨은 “성공하면 사람이 변한다고들 하는데 맞는 말이다. 권력은 매우 파워풀한 약물이다. 인간의 뇌에는 ‘보상 네트워크’라는 것이 있다. 뇌에서 좋은 느낌이 들게 하는 부분이다. 권력을 잡게 되면 이 부분이 작동한다.”라고 설명한다. 권력은 사람을 더 과감하고, 모든 일에 긍정적이며, 심한 스트레스를 견디게 한다. 권력은 항우울제다. 하지만 지나친 권력은 코카인과 같은 작용을 한다. 중독이 된다. 너무 많은 권력을 가지게 되면, 너무 많은 도파민이 분출된다.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지 않고, 실패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터널처럼 아주 좁은 시야를 갖게 하며, 인간을 자기애에 빠지게 하고, 오만하게 만든다. 갑질은 이 ‘터널 비전’에서 생기는 것이다.
‘모교를 위해서 평생에 등록금 한 번만 더 내자.’ 이런 편지에는 웬만한 졸업생들이 다 ‘그래, 나도 힘들지만 한 번은 더 낼 수 있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후원금 약정서 10만 원, 100만 원 등에 동그라미 치는 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당시에는 이경숙 총장이 어디 가서 30분만 말하면 몇 천만 원이 후원금으로 들어왔다는 문(?)이 교수들 사이에 있었다. 나중에 직접 한번 여쭤본 적이 있다. 어떻게 그런 후원을 끌어낼 수 있었냐고 말이다. 이렇게 설명했다. “돈을 달라고 하면 안 돼요. 목적이 돈이 되면 안 되고, 미래를 위한 꿈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해요. 나는 한번도 돈을 달라고 한 적이 없어요. 여성들의 교육을 위해서 어떤 일을 앞으로 함께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같이 꿈을 나누었어요. 마음이 움직이면 돈 이야기를 안 해도 도와주십니다. 나를 위해서 뭘 해달라는 게 아니라 여성 교육을 위해서 함께 일을 하자는 거니까 어디 가서든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
찰진 표현력, 촌철살인의 표현력을 기르려면 이제부터라도 기사의 제목을 유심히 보자. 기사 제목 중에는 촌철살인의 매력적인 표현이 많다. 기사의 제목은 크게 두 가지 역할을 해야 한다. 첫 번째, 기사의 내용을 요약해서 전달한다. 두 번째, 독자로 하여금 그 기사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해야 한다. 그런데 첫 번째 역할만 가지고는 밋밋한 제목이 된다. 두 번째 역할까지 해내려면 찰진 표현, 촌철살인의 표현이 들어가야 한다. 같은 이야기를 전달하더라도 매력적인 표현이 되면 더 마음에 다가온다. 구체적인 기사 제목 사례를 보자. “실내에서 안 터진다, 이용자는 속 터진다” 집에서 5G 신호가 잡히지 않아 와이파이로 연결하는데 잦은 끊김 현상으로 불편을 겪는 고객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경향신문> 기사의 제목이다.
자신의 주제를 아는 것, 자신의 DWT를 아는 것,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감투가 어느 정도인지를 아는 것, 쉬울 것 같지만 닥치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멀쩡하게 똑똑하던 사람들이 장관이니 뭐니 하는 감투만 쓰면 국민들 앞에서 거의 정신 나간 소리를 하게 되는 거다. 그 감투에 눈이 가려 판단이 안 되는 것이다. 기업을 하시는 분들에게서 무림의 고수들 이야기를 들으면 배울 게 많다. 탁상공론이 아니라, 진검승부를 하면서 매일 매일이 전쟁터인 비즈니스 세계는 흥미롭다. 말에도 ‘DWT(배가 가라앉는 무게)’가 있다. 말을 통해서 배가 뜨기도 하지만, 말을 통해서 배가 가라앉기도 한다.
기억에 남는 문구
'책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의 계단 - 신현준,김학균 (0) | 2021.06.22 |
---|---|
오만과 편견 - 제인 오스틴(Jane Austen) (0) | 2021.06.22 |
돈의 감정 - 이보네 젠 (0) | 2021.06.22 |
데일 카네기 골든 메시지 - 박영찬 (0) | 2021.06.22 |
어떻게 나이 들 것인가? -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0) | 2021.06.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