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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엄마에게 안부를 묻는 밤 - 박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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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안부를 묻는 밤

박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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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여행에서 엄마와 나는 특별한 무엇을 하지 않았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자고, 같은 풍경을 바라봤을 뿐. 엄마는 힘내라는 말도, 괜찮다는 위로도, 다시 일해야지 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옆에 있어 줬다. 엄마가 왜 나를 데리고 여행을 떠났는지 그때의 나는 몰랐다. 10년도 훨씬 더 지나고 나서 불현듯 깨달았다. 엄마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너는 혼자가 아니야. 힘들고 외로우면 언제라도 엄마에게 와.’ - 「위로보다 여행」 중에서

생각해 보면 참 다행이다. 내가 라디오 작가였다는 사실이. 나는 DJ가 읽을 원고에 엄마에게 한 번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담았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당신의 꿈이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궁금하다고. 엄마로 살아온 당신의 이름 없는 날들 덕분에 우리의 눈부신 날들이 존재한다고. 엄마에 대한 나의 고백이었다. 그때 생각했다. 내가 라디오 작가가 되길 참 잘했다고. 노래 하나로, 원고 하나로 구멍가게에 앉아 있던 엄마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었으니 말이다. - 「라디오 작가여서 다행이었던 날들」 중에서

청춘을 함께한 이들을 언젠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칠지도 모른다. 아니, 언젠가 한 번은 꼭 만났으면 좋겠다. 그래서 손을 잡고 못다 한 고백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네가 참 보고 싶고 그리웠다고, 우리의 그 시간이 참 행복했다고. - 「말할 수 없는 고독에 몸부림치더라도」 중에서

아빠가 받을 상처는 생각하지 못했다. 상처를 주고받지 않는 관계란 있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숱한 세월을 부대끼며 살아온 부모와 자식 또한 그럴 수 있다는 걸 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아빠가 나 때문에 상처받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나는 처음으로 뼈아프게 인정했다. 나만 상처받고 사는 게 아니라는 걸. 나 또한 부모를 비롯한 숱한 사람에게 상처를 줬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아빠는 내가 인생에서 배워야 할 한 가지를 슬프게 알려 주셨다

- 「아빠의 고백, 우리가 주고받은 상처들」 중에서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김애란의 단편 소설 <칼자국>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엄마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소설 속의 어머니가 20년 동안 칼이 종잇장처럼 얇아지도록 썰고, 자르고, 다지면서 딸을 키운 것처럼, 나의 엄마도 무수한 식당을 차리고 칼질을 하며 우리를 키웠으니까. 그런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자, 소설의 첫 문장에 한마디를 더 보태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 그리고 ‘위엄’이 서려 있다고. 엄마에겐 그런 게 있었다. 그것은 최선을 다해 살고 있는 부모들이 갖는 위엄 같은 것이었다.

- 「뼈아픈 당신의 한마디, “내가 니 새끼냐?」 중에서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상실을 겪으면서 조용히 품게 된 희망.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 보니, 나 자신은 물론 함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종종 안쓰러웠다. 누군가를 잃고도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다시 웃기 위해 애를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실패하고 좌절하고 상실을 겪으며 또 하루를 사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름도 모르는 그들을 바라볼 때면, 그 마음 나도 안다고 가만히 말해 주고 싶은 충동이 들곤 했다.

- 「나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중에서

‘한 철 머무는 마음에게 서로의 전부를 쥐여 주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라는 구절이 나오는 박준 시인의 시를 읽은 적이 있다. 현재형이 아닌 과거형의 ‘있었다’라는 시린 말을 들으면 묻게 된다. 그 눈부신 한 철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화사한 마음이 진 자리에는 무엇이 남을까? 그 답을, 어느 여행길에 두 손을 꼭 잡고 걷던 노년의 엄마와 아빠를 통해서 보았다.

- 「사랑이 진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가」 중에서

다시 한 해가 저물면서 엄마의 기일이 다가온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한자리에 모두 모일 것이다. 그때, 오늘 우리가 했던 얘기를 다시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얼굴을 보면서. 어떻게 지내냐는 평범한 안부와 시시껄렁한 농담 사이사이, 우리의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때는 조금 울어도 상관없겠지. 어쩌면 조금은 웃어도 괜찮을 것이다. 우리는 ‘함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추억할 수 있으니까.

- 「이별에 대처하는 각자의 자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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