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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그 이름을 부를 때 - 송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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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을 부를 때

송원근

이 책은 내 삶의 한가운데에서 겪은 치열했던 시간의 기록이다. 난생처음으로 영화를 만들고, 극장에 상영을 하고, 그 속에서 관객들과 함께 보낸 시간들. 잊힌 줄 알았던 그때의 기억들이 봄날의 꽃잎이 되어 하염없이 흩날린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르게 내 삶으로 들어왔던 그때의 시간들은 내 삶에 지워지지 않을 기억을 새겼다. 그리고 ‘김복동’이라는 이름을 남겼다. 영화 「김복동」을 제작하던 날들은 그렇게 지금도, 내 마음에 남아 있다.

영화 「김복동」을 개봉한 지 2년. 이렇게 나의 이야기를 책으로 남기는 것은, 영화를 제작하며 지나온 시간들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자꾸만 떠올리는 행위이다. 머리에서,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되뇌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이름이 일깨워준 세상을 기억하게 하는 역할을 영화 「김복동」이 할 수 있다면, 또 이 책 『그 이름을 부를 때』가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될 것 같다.

2021년 8월
송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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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관객들에게 ‘희망’을 전해야 한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의 마음속에, 문제 해결을 위한 열망을 심어야 한다. 그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처절한 절규와 끔찍한 과거를 되짚는 영화가 아닌, 피해자를 넘어서 스스로 다른 피해자를 돌보고 안아주던 할머니를 그려야 한다. 이를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이제 남은 싸움은 우리가 하겠다는 마음이 생겨야 한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사회자는 몇 번이나 할머니의 삶을 ‘고통 속에 살다 간’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그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할머니는 스스로 고통 속의 피해자로만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용감하게 다른 피해자들을 감싸 안았다. 할머니의 삶을 들여다보고 또 조금씩 알아갈수록 할머니의 삶은 고통이나 절망이라는 표현보다 용기와 희망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고 생각되었다. 그만큼 좌절에 갇혀 신음만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에, 고통이라는 말이 싫었다. 어쩌면, 세상의 선입견이 싫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휘감고 있는 저런 시선을 우리 영화가 바꿔줄 필요가 있다.

바람에 실린 모래가 카메라를 때려대는 모습이 오늘도 아파 보였다. 육지에 닿은 바람은 멈추지 않고 모래 위를 날아 그 위에 물결 모양의 바람 자국, 풍문(風紋)을 새겼다. 모래 위 무늬는 거센 바람에 의해 사라졌다가 만들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다대포 바닷가에서 끝없이 부서지고 만들어지는 바람의 자국이 나에게는 끝없는 고민을 반복해야만 했던 ‘김복동의 시간’으로 느껴졌다. 아무리 지워내고 씻어내려 해도 기어이 다시 돋아나는 상처 같기도 했고, 그런데도 또 일어서 걸어가야만 했던 의지,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다대포 바다를 바라보던 김복동의 모습을 다시 상상한다. 쉼 없이 사라지고 생겨나기를 반복하는 이 풍문을 바라보며 무엇을 떠올렸을까.

영화 한편을 통해 관객을 만나는 일이 개개인의 우주를 만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한 편이 뻗어나갈 수 있는 생각의 범위가 얼마나 넓고 깊고 세밀한가. 영화를 만들면서도 느끼지 못한 일들에 대해 자꾸만 질문을 던지는 관객들을 만나는 일은 온몸의 세포를 되살리는 일이기도 했다. 그저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에 멈추고 마는 것이 아니다. 영화 한 편을 두고, 만 갈래의 생각이 교차하는 지점 한가운데에 서서 그 생각들의 종류와 색깔을 살피고 있다. 살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김복동」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만나게 되며 살아 있는 나를 느낀다.

친한 선배가 안색이 좋지 않은 나를 보고 묻는다. 영화 한 편을 위해 왜 그렇게까지 몸을 혹사하느냐고. 영화 그게 뭐라고 그렇게 까지 하느냐고. 나는 대답한다. 내가 앞으로 사는 동안 「김복동」 같은 작품을 또다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내 삶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지, 아니면 잠시 후 멈추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 내게 선택지는 없다고 말이다. 후회하고 싶지 않다. 마흔 남짓한 삶을 사는 동안 「김복동」이라는 작품을 연출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길, 좋은 영화의 감독으로 남을 수 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기억에 남는 문구

몰랐다는 말은 무관심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