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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마이 스트레인지 보이 - 이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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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스트레인지 보이

이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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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장애아의 엄마가 되는 동안 내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다음과 같다. 비이성적인 죄책감은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망쳐버릴 수 있으며, 열등감을 극복한다는 것과 열등감을 부정하는 것은 한 끗 차이일 수 있다는 것. 가면을 사용해 살아온 사람은 그나마 그 가면을 사용했기에 그때까지 죽지 않을 수 있었고, 자기를 손상시키든 자기를 고양시키든 따질 거 없이 뭐라도 붙들고 살아봐야 하는 시간이 세상에는 존재하더라는 것을 말이다.

아이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렇게 많은 걸 순식간에 다 잃어버렸는데도 여전히 한 생명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 목숨의 질김이 너무 이상하고 무서웠다.

나는 내가 운이 나빴다고 생각했다. 나는 누군가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았고, 내가 살고 있어야 할 어떤 세계에서 쫓겨난 것 같았다. 수치심. 그것은 지독히 단단하여 깨지지도 않는 거울이었다.

나의 삶을 아주 가까이에서 쭉 지켜본 이들이 아니라면, 언제라도 내 쪽에서 한번은 입을 열어야 했다. 그들과 다시 눈을 마주치려면, 그들과 다시 밥을 먹고 같은 얘기에 함께 웃으려면, 나는 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은 내게 이토록 커다란 일이 있으니 나를 좀 위로해달라거나, 내 당황스러움에 공감해달라거나, 제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네가 설명을 좀 해달라거나 하는 이유였을까?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몇 개의 시간을 동시에 살아가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몸으로 겪어내는 시간이 있고, 비로소 머리로 뒤늦게 이해하는 시간이 있으며, 가슴으로 느끼는 시간은 또 따로인 것 같았다.

나를 나로서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 나를 응원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그 어렴풋한 느낌이, 어느 한 토막의 시간을 완전히 베어내고 그때와 단절하고 싶었던 내 마음을 조금은 바꾸었을까. 그렇게 도망치지 않아도 뭔가 방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노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 희망에 관한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는 아이의 시력이 상실됐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모든 것을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예전처럼 다시 앞을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뇌가 더 좋아질 가능성이 있고, 그래서 팔을 조금 더 움직일 수 있게 될 거란 이야기가 희망으로 들릴 것 같지 않았다. 무엇도 나를 여기서 조금도 빼내 줄 수 없을 거라 확신했고, 무엇에도 별로 애쓰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 이어졌다.

아이가 보고 만지고 일어서고 움직였던 모든 흔적이 있는 곳에서, 이제 아이는 온몸이 나무토막처럼 굳어서는 하루 종일 힘주고 있다. 아무리 사과를 소리 내 잘라봐도, 세탁기를 돌릴 때마다 “엄마 이제 세탁기 돌린다” 다정하게 외쳐보지만, 슬쩍 돌아보면 아이는 누워 있다.

아이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 아이를 관찰하고 들여다보며 몸을 재빨리 움직여대던 지난 시간들이 모두 나의 모성애일 거라 확신했지만, 실은 그러고 있는 나 자신을 사랑했던 지독한 자기애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떠올랐다. 아이를 통해 나의 인격과 나의 사랑을, 나의 그릇과 나의 인생을 증명해내려던 것이 아니라고 완전히 부정할 수가 없어서, 그리고 아마 그게 맞을 것 같아서, 슬프고 비참했다.

그때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장애가 있는 이 아이를 우리가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이 아이를 얼마나 미워해도 되는지에 대한 허락 같은 건 아니었을지 생각한다. 태어남과 동시에 나를 울게만 만든 아이를 미워하고 원망해도 된다고. 사랑이란 어차피 시간 위에 쌓이는 것이니 지금은 당황하고 서툴러도 된다고.

기억에 남는 문구

산다는 건 기본적으로 너무 이상했다.
내게는 이리도 잔인한데
우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또 얼마나 사소한 일일까 생각한다.
이 또한 지나간다거나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내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거라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자신의 삶으로
그 말을 증명해낸 이들에게는
왠지 의지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