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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 아잔 브라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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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아잔 브라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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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인간은 누구나 두 장의 잘못 놓인 벽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각자 안에는 그 잘못된 벽돌보다 완벽하게 쌓아올려진 벽돌들이 훨씬 많다. 일단 그것을 아는 순간, 상황은 그다지 나쁘지 않게 된다. 그때 우리 자신과 평화롭게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가진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상대방과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잠시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라져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사라져줌으로써 그들 자신의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다!

어둡다고 불평하는 것보다 촛불을 켜는 것이 더 낫다.

진정한 사랑은 에고가 사라진 사랑이다. '내 마음의 문은 언제나 당신에게 열려 있다. 당신이 삶에서 무엇을 하든.' 누군가로부터 그런 종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선물을 받는 것이다. 그때 당신은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잃어버리지 않게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한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는 수많은 가능성이 있다. 불행한 가능성에 집중할 때, 그것은 두려움이라 불린다. 반면에 다른 가능성들이 훨씬 많음을 기억할 때 그것은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라 불린다.

두려움은 미래의 잘못될 일들을 예측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불확실한가를 마음속에 간직하기만 해도 결코 무엇이 잘못될 것인가 예측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두려움은 끝난다.

두려움은 고통의 가장 큰 원인이다. 고통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이 바로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벗어던지면 단지 아프다는 감각만이 남는다. 내가 내려놓은 것은 치통의 아픔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그 아픔을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껴안았고,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것은 떠나갔다.

누군가가 우리를 상처 입혔을 때 우리 자신이 직접 그들을 처벌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인이거나 회교도이거나 유태교도라면 분명 우리는 신이 그들을 충분히 벌할 것이라고 믿지 않겠는가? 만일 우리가 불교도이거나 힌두교도이거나 시크교도라면 우리는 카르마의 법칙이 그 가해자에게 공정한 벌을 내릴 것이라고 믿지 않겠는가? 그리고 만일 당신이 현대의 신흥종교라고 할 수 있는 심리요법의 추종자라면 당신의 가해자가 죄책감에 시달리며 수년간 비싼 심리치료를 받아야 하리라는 걸 알 것이다. 따라서 왜 우리 자신이 꼭 '그들을 따끔히 혼내 주는' 장본인이 되어야만 하는가? 조금만 지혜롭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굳이 처벌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가 있다. 화난 마음을 내려놓고 용서로써 마음을 식힐 때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나의 미친 마음이여, 네가 나에게 무슨 짓을 하든 내 마음의 문은 너에게 열려 있다. 네가 나를 파괴하고 파멸에 이르게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너에게 어떤 나쁜 마음도 갖고 있지 않다.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나는 너를 사랑한다.

절망은 우리 모두가 통과해야만 하는 감옥이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상황을 견뎌 내게 도와준다. 그것은 또한 절망의 가장 큰 원인인, 행복한 시기를 너무도 자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버리게 해 준다.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아왔으며, 퍼나를 소똥이 많지 않았던 수행자들은 위대한 스승이 될 수 없었다. 위대한 스승이 된 사람들은 실로 크나큰 시련을 겪으면서 묵묵히 소똥들을 퍼 날랐으며, 풍요로운 내면의 정원을 가꾼 이들이었다.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수행자들이 지혜와 내적인 고요와 자비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더 많은 소똥을 가졌던 이들은 세상과 나눌 것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카르마의 절반은 우리가 가진 재료이다. 그 나머지 절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리가 그 재료를 가지고 이 삶에서 무엇을 하는가이다. 우리가 가진 나날의 재료들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설령 그것이 단지 자리에 앉아 마지막 차 한 잔을 즐기는 일일지라도.

갈림길에 이르러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확신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때 당신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길가에 서서 버스가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머지않아 당신이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에 버스가 도착할 것이다. 버스 앞 유리창에는 크고 굵은 글씨로 행선지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붙어 있다. 그 목적지가 당신과 맞으면 당신은 그 버스에 올라탄다. 그렇지 않으면 기다린다. 언제나 또 다른 버스가 뒤이어 도착할 테니까.

자신의 믿음으로 주위 사람과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종교적인 광신자 때문에 그가 믿는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 초심자가 아직 그 종교를 잘 배우지 못한 것일 뿐이다. 우리 각자는 종교 안에서 사랑의 거장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삶의 어느 순간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 있는 영적인 피라미드를 올라갈 수 있는 시간과 평화를 자기 자신에게 허용할 필요가 있다. 아주 잠깐 동안이라도 삶이라고 하는 이 복잡하게 뒤엉킨 정글 위로 올라가 봐야만 한다. 그때 우리는 사물들 속의 자신의 위치를 보게 되고, 삶의 여행을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방향에서 우리 존재를 에워싸고 있는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무한 세계를 응시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유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욕망의 자유이고, 또 하나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어떤 장소든 당신이 그곳에 있기를 원치 않는다면, 아무리 안락하더라도 당신에게는 그곳이 감옥이다. 이것이 '감옥'이라는 단어의 의미이다. 당신이 머물고 싶어 하지 않는 어떤 상황, 그것이 곧 감옥인 것이다. 만일 당신의 직업이 당신이 원치 않는 것이라면, 그때 당신은 감옥에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원치 않는 관계 속에 있다면 당신은 또한 감옥에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병들고 고통스런 육체 속에 있는데 그것을 원치 않는다면 그것 역시 당신에게는 감옥이다. 당신이 원치 않는 어떤 상황이 곧 감옥인 것이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다. '삶에서 어떤 것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생각 때문'이라는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교훈을 나는 일찍이 태국 북동부에서 승려 생활을 하던 초기 시절에 배웠다.

다른 무엇이 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상에 불과할 뿐이다. 다른 무엇이 되는 것은 단지 한 가지 형태의 고통을 또 다른 형태의 고통과 맞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결혼을 했든 독신이든, 부자든 가난하든, 신참이든 고참이든 지금의 당신에 만족할 때, 그때 당신은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슬픔은 당신으로부터 사라진 것만을 보는 것이다. 반면에 삶의 축제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느끼는 것이다.

기억에 남는 문구

늘 깨어 있도록 노력하라.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놓아두라.
그러면 마음은
어떤 환경에서도 고요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