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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태고의 시간들 - 올가 토카르추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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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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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그는 보다 고차원적이고 지속적이며 고귀한 것, 인간보다는 시간에게 더욱 익숙한 것을 원했다. 시간 속에서 그의 사랑을 언제까지나 유지하게 할 수 있는 것, 시간 속에서 그녀를 영영 멈추게 하는 것을 바랐다. 덕분에 그의 사랑은 영원한 것이 되었다.

1939년 여름, 신이 주위의 모든 곳에 있었기에 수상쩍고 예사롭지 않은 일들이 일어났다. 처음에 신은 가능한 모든 것들을 창조했다. 하지만 실제로 신은 전혀 일어날 수 없거나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것들, 다시 말해 불가능한 것들의 신이었다.

쿠르트의 병사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쿠르트는 그들을 만류하지 않았다. 총을 쏜 건 그들이 아니었다. 낯선 나라에서 느끼는 공포와 고향을 향한 향수가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그들은 총을 쏘았다.

땅바닥에 누워 있던 사람 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강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게노베파는 그녀가 미시아와 동갑내기 친구이자 셴베르트네 식구인 라헬라임을 알아챘다. 품에는 갓난아기가 안겨 있었다. 군인 한 명이 무릎을 꿇더니 침착하게 그녀를 조준했다. 라헬라는 한동안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다. 군인이 달려가 그녀를 발로 밀어서 돌아 눕히는 것을 게노베파는 보았다. 군인은 아기를 싼 새하얀 포대기를 향해 총을 한 방 더 쏘고는 트럭으로 돌아갔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건 움직일 수 있는 권리를 빼앗는다는 뜻이다. 삶이란 결국 움직임이니까. 죽임을 당한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인간은 몸이다. 그리고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의 시작과 끝은 몸 안에 있다.

파베우는 자신이 길가의 한옆에 내던져진 돌멩이나 버려진 아이 같다고 느꼈다. 그는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이 거친 현재의 시간 속에서 바닥에 등을 대고 똑바로 누운 채 스스로가 매초 무(無)의 늪으로 가라앉고 있음을 생생히 감지했다.

세상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생을 찬미할수록, 생과 더욱 강렬하게 연결될수록 죽은 자들의 시간은 더욱 혼잡해졌고, 공동묘지는 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죽은 자들은 이곳에 와서야 ‘삶이 끝난 후’에 대해 인식하게 되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주어진 시간을 허비했음을 깨닫게 된다. 죽고 난 뒤에 비로소 생의 비밀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 발견은 헛된 것이었다.

“다 잘될 거예요. 세상이 전과 많이 달라졌잖아요. 더 커지고, 더 나아지고, 더 밝아졌으니까요. 예방주사도 생겼고, 전쟁도 끝났고, 사람들의 수명도 늘어났고……. 안 그래요?” 미시아는 유리잔에 가라앉은 찌꺼기를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저었다.

미시아의 영혼이 그녀의 몸에서 분리되고 생물학적 두뇌 활동이 멈춰지게 되면, 미시아 보스키는 영원히 사라진다는 사실이었다. (…) 종국에는 그녀의 생각과 말, 그녀가 직접 겪고 몸담았던 모든 일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인생처럼 평범하지만, 그 속에는 어둠과 슬픔이 깃들어 있다고 가족들은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