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때로 쓸쓸한 가운데 가만히 앉아 옛일을 생각해보면 떨어지는 꽃잎처럼 내 삶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하나둘 보인다. 어린 시절이 지나고 옛일이 그리워져 자주 돌아보는 나이가 되면 삶에 여백이 얼마나 많은지 비로소 알게 된다.
주름이나 흔적은 늦여름 골목길에 떨어진 매미의 죽은 몸처럼 삶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여분의 것인데 지난 몇 년간 나는 거기에 너무 마음을 쏟았다. 이젠 알겠다. 역사책의 페이지가 부족해 세세하게 기록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마음 둘 필요 없는 주름이나 흔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자꾸만 그런 것들에 마음이 간다.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왜 누군가를 사랑하는가? 그건 우리가 살면서, 또 사랑하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일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모세를 닮은 재벌 3세가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내 이름을 새긴 기념비를 남산 꼭대기에 세워준다고 해도 나는 그 일들과 맞바꾸지 않을 것이다. 때로 너무나 행복하므로, 그 일들을 잊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살아가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밤을 사랑한다.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진 검은 얼굴을 지녔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그 눈들은 저마다 빛을 낸다. 그 빛 속 하나하나에 그대들이 있다. 외로운 그대들, 저마다 멀리서 흔들린다. 문득 바람이 그대 창으로 부는가, 그런 걱정이 든다. 하지만 그건 멀리 있기 때문에 흔들리는 빛이다. 한때 우리는 너무나 가까웠으나, 그리하여 조금의 흔들림도 느낄 수 없었으나…….
내가 기억하는 청춘이란 그런 장면이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애매한 계절이고, 창문 너머로는 북악스카이웨이의 불빛들이 보이고, 우리는 저마다 다른 이유로, 다른 일들을 생각하며, 하지만 모두 함께 김광석의 노래를 합창한다.
그러니까 한 여자애와 헤어지면서 그 어마어마했던 나만의 세계가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제는 내 세계 안쪽 창에 맺힌 슬픔만으로는 부족했다. 비로소 나는 그 바깥의 슬픔, 타인의 슬픔에까지도 눈을 돌리게 됐다. 내게는 슬픔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내가 삶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쩌자고 삶은 그처럼 빨리 변해가는가? 어쩌자고 우리는 열아홉 살에 헤어지게 된 것일까? 어쩌자고 모든 것은 조금만 지나면 다 나아지는가? 어쩌자고 고통은 때로 감미로워지는가?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은 끝이 없으나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겪을 모든 일들을 스무 살 무렵에 다 겪었다는 사실을. 그 모든 사람을 스무 살 무렵에 다 만났으며 그 모든 길을 스무 살 무렵에 다 걸었습니다. 그 모든 기쁨을, 그 모든 슬픔을, 그 모든 환희를, 그 모든 외로움을, 스무 살 무렵에. 창덕궁에서 종로 3가 극장 쪽을 향해 걸어갈 때, 혹은 텔레비전에서 문득 시인 기형도에 대한 프로그램을 볼 때, 심지어는 카푸치노를 마실 때마다 스무 살 그 시절이 떠오릅니다. 교수님들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교양 국어 시간에 뭘 배웠는지는 일찌감치 잊어버렸는데, 스무 살 무렵에 만났던 사람과 어디를 걸었는지, 그가 무슨 커피를 즐겨 마셨는지, 우리가 어느 극장에서 무슨 영화를 봤는지는 아무리 해도 잊혀지지 않더군요.
그제야 나는 내가 사는 이 땅의 풍경이, 누군가에게는 한 번 떠나고 다시 오지 않는 어떤 이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되리라는 걸 깨닫는다. 언젠가 어떤 이와 나란히 걸으며 바라보던 풍경,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땅의 풍경, 살아가는 동안 몇 번이고 우리가 보게 될, 그리고 우리가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을, 겨울과 봄과 여름과 가을이라는 걸.
기억에 남는 문구
'책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해, 여름 손님 - 안드레 애치먼 (0) | 2023.01.07 |
---|---|
빛의 과거 - 은희경 (0) | 2023.01.06 |
힘 빼기의 기술 - 김하나 (0) | 2023.01.05 |
L의 운동화 - 김숨 (0) | 2023.01.04 |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 김원영 (0) | 2023.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