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에 너를 숨겨놓았다
김미경
옥상에 올라 서촌의 풍광을 담아낸 펜화 작품들로 '서촌 옥상화가'라는 이름을 얻은 김미경 작가의 세 번째 책. '가난하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기'로 마음먹고 화가의 길을 선택한 지 5년째인 김미경 작가의 소박한 삶의 태도와 '서촌옥상도'를 포함한 대표작 100여 점을 만날 수 있는 그림 성장 에세이다.
옥상에서, 길거리에서, 하루 종일 그림 그리며 살기 시작한 지 2018년 올해로 5년째인 '김미경'이란 작가가 그림으로 표현하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소중한 것들'에 대해 아낌없이 쏟아낸다. 한마디로 '그림 농사꾼의 5년 그림 작황 보고서'다. 전업 화가로서 그동안 소셜미디어(SNS)에 올렸던 그림 이야기와 2017년 「한겨레」에 '김미경의 그림나무'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과 그림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책속에서
“미술대학을 나오지도 않고, 미술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은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화가가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하는 대답이 있다. ‘뉴욕 생활이 나를 화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대답이 떨어지면 대부분의 사람은 금방 “뉴욕에서 미술을 배웠군요!” “음… 역시! 뉴욕 뮤지엄, 갤러리에서 좋은 그림들을 많이 본 덕이군요!”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뉴욕 화가들을 많이 보다 보니 화가가 되셨군요!” 한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뉴욕에는 화가들이 넘쳐났고, 직장 옆에는 뮤지엄과 갤러리가 즐비했다. 구멍가게 드나들 듯 뉴욕 뮤지엄과 갤러리들을 드나들며, 수도 없이 많은 그림을 보고 즐겼던 게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내가 화가가 되는 데 뉴욕이 기여한 건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옥상에서 그리기 시작한 이유는 단순했다. 옥상 풍경이 신기하고, 재미나고, 매혹적이어서였다. 옥상에서는 땅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전혀 다른 구도의 풍광이 펼쳐진다. 처음 옥상 풍광에 매혹된 건 뉴욕에서였다. 옥상에 야외 갤러리를 뒀던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설치 작품들은 하늘과 센트럴파크와 맨해튼 건물과 어울려 닫힌 갤러리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황홀한 구도를 만들어냈다. (중략) 7년 만에 돌아온 한국에서 처음 동네 옥상에 올라간 날. 인왕산과 그 아래 펼쳐진 기와집과 적산가옥과 현대식 빌라가 어울려 연출해낸 옥상 풍광은 맨해튼보다 훨씬 강렬했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매일 옥상에 오른다. 옥상 풍경과 깊은 사랑에 빠지면서 옥상화가가 되어갔다.
동네 한 모자 집 간판에 ‘나는 아직도 너를 내 시 속에 숨겨놓았다(I still hide you in my poetry)’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지나갈 때마다 ‘나는 아직도 너를 내 그림 속에 숨겨놓았다’로, 바꿔 큰소리 내어 읽어본다. (중략) 좋아하는 마음을, 열정을, 그림 어딘가에 꽁꽁 숨겨놓는 재미가 솔찬하다.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부터의 기억을 더듬다가 무릎을 탁 쳤다. 그렇구나!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과의 기억이, 추억이, 나를 그리게 하는구나! 좋아하는 사물들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를 그리게 하고, 그리다 보면 점점 더 좋아지기도 하는구나!
동네 꽃 일 년 따라 그리기! 누구에게든 권한다. 작은 스케치북 하나를 산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꽃을 골라 앞에 앉는다. 한참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연필로 그리고 싶은 부분을 살짝 그린 후 펜으로 그린다. 물감도 살살 칠해본다. 어느 동네이든 꽃은 필 테고, 꽃을 따라다니다 보면, 분명 감성의 주름살이 조글조글조글 늘어나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될 게다. 앞으로 어떤 새로운 동네로 이사 가 살더라도, 꼭 일 년 동안 그 동네에 피는 꽃 따라다니며 그리기부터 시작해볼 참이다.
아직 사회 이슈를 캔버스에 담아내는 일은 힘들다.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있을 때 펑펑 눈물 흘리며 그리워할 수 없는 걸 그려 내는 일이 너무 어렵다. 고백하건대, 민주주의를 갈망하지만 혼자 방에 앉아, 눈물 뚝뚝 흘리며, 민주주의를 위해 잘 울지 못한다. 젊은 시절 그런 자신이 창피해 일부러 통일을 위해, 노동자 차별 철폐를 위해 우는 연습을 오래오래 숨어 했지만, 쉽지 않았다. ‘거짓뿌렁’의 느낌으로는 그릴 수가 없다. 지금 내 가슴을 터지게 하는 것들부터 하나씩 그려나가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매일매일 옥상에 올라 혼자 그림 그리다가, 팔 아프면 춤추다가, 또 그림을 그리다가, 또 춤춘다. 내 그림 속에 춤을 어떻게 녹여낼 수 있을까? 춤추며 횡단보도를 건널 때의 그 도시 속에서 문득 원시를 만나는 그 황홀한 느낌을 어떤 구도로 그려낼 수 있을까? 춤처럼 좀 더 자유로운 그림을 그릴 수는 없을까? 춤처럼 내 그림이 좀 더 솔직해질 수는 없을까? 이것이 요즘 내 그림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됐다. 아직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내 그림 속에서 춤이 더 무르익어 녹아나는 날을 꿈꾼다. 내 그림이 춤처럼 좀 더 솔직하고, 좀 더 자유로워지는 날을 꿈꾼다.
그럴 때마다 말한다. “그림 좋아하는 마음, 그림 그리는 사람이 부러운 마음, 그림 그리고 싶은 마음이 바로 소질인 것 같아요. 30여 년 전 어른이 되어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저 정말 너무 못 그렸어요. 못 그린 게 아니라 제가 그려낸 그림들이 창피했어요. 그래도 그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서 자꾸자꾸 그렸어요. 소질은 혼자 자라진 않는 것 같아요. 그리는 게 소질이라는 나무에 물을 주고 거름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자꾸 물주고 다듬어주다 보면 어느새 무럭무럭 자란 나무를 만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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