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 리뷰

미루기의 천재들 - 앤드루 산텔라(Andrew Santella)

728x90

미루기의 천재들

앤드루 산텔라(Andrew Santella)

미루기 전문가로서 자신의 미루는 습관을 심도 있게 들여다보고자 했던 앤드류 산텔라는 2015년 ‘미루기를 위한 여행길’에 올랐다. 이 여정에서 그는 심리학자와 경제학자, 성직자, 철학자와 이야기를 나누며 미루기를 신체적, 정신적, 문화적 차원에서 조명하는 다양한 관점들을 만났다.

이를 바탕으로 성서부터 햄릿까지, 다양한 문헌에 나타난 미루기의 면면을 살피고, 수많은 천재들의 미루기 영웅담을 수집하며 그 안에서 미루는 행위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음미하고자 했다. 그 결과를 오롯이 담아 ‘미루는 나’를 돌아볼 유쾌하고도 따뜻한 고찰의 기회를 선사해준다.

책 읽으러 가기

책속에서

다윈은 자신이 해야 할 단 하나의 일, 해야 한다는 걸 스스로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그 일, 바로 세상을 바꿀 자연선택에 관한 책의 출판을 제외한 모든 것을 하며 20년을 보냈다. 이런 의미에서 다윈의 자서전은 대체로 낭비한 에너지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할 일을 미루는 사람은 자기 일을 회피하는 와중에도 감탄스러울 만큼 바쁘게 지낼 수 있다. 다윈은 새 이론에 관해서는 이상할 정도로 입을 다물었지만 그렇다고 다윈을 태만한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다. 증거가 필요하다면, 간단하다. 따개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유머 작가인 로버트 벤츨리(Robert Benchley)는 <일을 해내는 방법(How to Get Things Done)>이라는 에세이에서 미루기의 기본 원칙을 설명하며 진실에 성큼 다가섰다. “누구든 얼마든지 많은 양의 일을 해낼 수 있다. 그 일이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면.” _1장 「부지런하게 꾸물거리기」

도로시 파커(Dorothy Parker)는 초고를 내기까지 왜 그리 오래 걸렸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다른 사람이 제 연필을 쓰고 있었거든요.” _1장 「부지런하게 꾸물거리기」

페라리와 다이앤 타이스(Diane Tice)의 연구에서, 대학생들은 별 의미는 없고 그저 재미로 시험을 치르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자신의 능력을 평가하는 의미 있는 시험을 치르게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시험 준비를 더욱 미루는 경향을 보였다. 즉, 일을 미루는 사람들은 시험이 중요할수록 준비를 미룬다. (…)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 결과가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그들은 더욱 절박하게 스스로를 보호해야만 하는 것이다. (…) 작가 로버트 행크스(Robert Hanks)의 글을 읽다가 깊은 인상을 받고 적어둔 구절이 있다. “나는 거의 항상 겁먹고 슬퍼하기 때문에 일을 미룬다.” _2장 「적절한 기분이 될 때까지」

일을 미루는 사람은 우울하고 망상에 빠져 있고 자기 파괴적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낙관주의자이기도 하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을 하는 데 지금보다 더 적합한 시기가 있을 거라고 늘 믿는다. _3장 「내일을 향한 믿음」

일을 미루는 사람으로서, 나는 게으름을 피우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먼저 내키는 대로 책도 한 권 더 읽고, 콜트레인(John Coltrane) 음반도 듣고, 샤워도 하고, 공원도 산책한다. 이 모든 건 ‘글쓰기’라는 항목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나는 술 한 잔을 손에 들고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글을 쓰고 있는 거야. 때가 되면 ‘글쓰기’를 멈추고 진짜 글을 쓰기 시작할 거야. _4장 「오늘 할 일-걱정하기」

오늘날 우리는 레오나르도가 그린 헬리콥터나 잠수함, 심지어 로봇의 도안을 보며 감탄한다. 하지만 그 시절 레오나르도를 고용한 이들이 궁금해했던 건 단 하나였다. 과연 이자가 약속한 날에 약속한 일을 마칠 것인가? _4장 「오늘 할 일-걱정하기」

평론가 루이스 메넌드 Louis Menand는 ‘모범 기준’이라는 개념이 경영 전문 대학원에서 문화 전반으로 퍼져나갔다고 보았다. 그 결과 우리는 실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개인 능력의 이상적인 모습을 내면화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상이라는 가공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따라서 당연히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여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주기적으로 자신을 평가한 뒤 낙제시키기를 반복한다. _5장 「시계는 가고 우리는 일한다」

우리가 하는 것, 우리가 하기를 미루는 것, 우리가 언젠가 하기로 계획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정의한다. 우리가 왜 그 일을 하고 있거나 하지 않고 있는지 스스로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_5장 「시계는 가고 우리는 일한다」

릴케 역시 간접적인 방식으로 이뤄지는 일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을러질 수밖에 없는 그날들이 사실은 정말 심오한 활동을 하고 있는 때인 건 아닌지, 나는 종종 되묻게 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돌아보면 사실 위대한 도약의 마지막 잔향일 뿐이고, 위대한 도약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보낸 시기에 발생하는 게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모든 미루기 전문가가 배우고 익혀야 할 마법 같은 생각이다. _6장 「천재성의 원천」

당연히 나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미 후회 머신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다 끝내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충분히 체계적이고 이성적으로 살아간다면 100퍼센트 만족스러운 상태로 죽을 수 있다고 믿는가? 나는 결코 스스로 원하는 만큼 완벽할 수 없을 것이고, 스스로 원하는 만큼 끝내주게 멋질 수도 없을 것이다. 나에겐 둘 다 필요하다. 해야 하는 일에서 도망가는 것도, 흠잡을 데 없는 착실함도. 후회도, 실천도.
나는 인간이다. 나의 결점은 나의 가장 훌륭한 점과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_8장 「급할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