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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동시대 미술 안내서 - 그레이슨 페리(Grayson Pe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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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가면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을 위한 동시대 미술 안내서

그레이슨 페리(Grayson Perry)

터너 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도예가, 대영제국 3등급 훈장 보유자, 영국 왕립 미술원 회원이자 크로스드레서인 그레이슨 페리가 쓴 콤팩트한 동시대 미술 입문서.

그는 이 책에서 동시대 미술의 세계가 작동하는 원리를 특유의 블랙 유머를 섞어 가며 속속들이 파헤친다. 또한 예술가의 내밀한 속마음을 본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진솔하게 들려준다. 보통의 감상자들이라면 이 책을 통해 동시대 미술이라는 모호하고 현학적인 세계 전반을 아우르며 그 본질을 꿰뚫는 눈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현역 예술가라면 이 책에서 따뜻한 위로와 혼자가 아니라는 연대의 느낌뿐 아니라 경력을 만드는 강력하고도 기발한 팁을 얻어 갈 수 있다.

그레이슨 페리는 2013년에 시각 예술가로는 최초로 BBC 리스 강연에서 동시대 미술 이야기를 풀어냈다. 1948년부터 BBC 라디오에서 해마다 개최하는 리스 강연에서는 스티븐 호킹, 버트런드 러셀, 마이클 샌델 같은 일급 지성들이 강단에 섰는데, 그레이슨 페리의 강연은 그 가운데서도 최고 인기를 누렸다. 이 책은 이 강의를 바탕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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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언젠가 나는 〈다정한 합의〉라는 항아리를 만들었다. 그때 나는 딜러에게 내 작품을 손에 넣으면 좋을 만한 사람들과 기관들 상위 50위까지의 명단을 받아 그 항아리에 장식처럼 그 이름들을 써넣었다. 그 항아리는 터너 상 전시회에 전시되었는데, 항아리에 이름이 적힌 이들 중 다키스 조아누라는 거물 수집가가 테이트 갤러리에서 그 항아리를 보다가 전화를 걸어 그걸 구매했다. 여담이지만 이건 예술가들에게 알려주는 작은 팁이다.”

예술의 정의와 관련된 경험을 통해 내가 알게 된 것이 있다. 그건 예술이 예술가가 행한 무엇이어야 한다든지 하는 형식적 경계선들이 아니라 취향과 관련한 경계선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게 속물성의 한 예라고 생각한다. “그래, 누구나 예술을 할 수 있고 그들이 하는 모든 게 예술이 될 수 있지.”와 같이 세련되고 아량이 넓어 보이는 태도 밑에는 흥미롭게도 일종의 계급적 속물근성이 흐르고 있다.

문신이나 피어싱, 마약, 다른 인종 간 섹스, 페티시즘 같은 건 한때 전복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예술가들이 자신의 자유로움과 남다름을 보여 주기 위해 활용하던 수단이지만, 이제는 이 모든 것을 토요일 밤 가족이 시청하는 리얼리티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인 〈엑스 팩터〉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진짜 위험한 것, 절대 볼 일 없는 한 가지는 겨드랑이 털밖에 없다!

작품을 만들 때, 아이들의 작품에 담긴 의미와 아이들이 전달하려는 메시지와 아이들이 표현하는 감정 들은 모두 아이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밖으로 배어난다. 나에게 미술 학교에 가면 잘하겠다고 말해 준 미술 선생님은 내 그림으로 배어나와 얼룩처럼 묻어 있던 내 무의식의 흔적을 보았던 거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 선생님은 내가 언어로 자기를 표현하는 것은 십대답게 대단히 어색해하지만 그림으로는 나 자신을 훨씬 더 많이 내보인다는 걸 알아챘던 것이다.

친구는 아이들에게 “너희는 동시대 예술가가 하는 일이 뭐라고 생각하니?”라고 물었다. 그러자 한 아이가 꽤 조숙한 태도로 손을 들더니 “스타벅스에 앉아 빈둥거리며 유기농 샐러드를 먹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거야말로 도시의 화려한 구역에서 많은 예술가들이 하는 행동을 꽤 정확하게 지적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동시대 예술가들이 하는 일을 알아보며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고서 프로그램이 끝날 때 친구는 다시 물었다. “이제는 동시대 예술가들이 무슨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그러자 아까 그 아이가 다시 말했다. “그들은 사물들을 알아봐요.” 나는 생각했다. ‘와, 이거야말로 정말 예술가가 하는 일에 관한 짧고 예리한 정의인 걸!’

핀란드의 사진가 아르노 밍키넨은 2004년에 ‘헬싱키 버스터미널 이론’이란 것을 내놓았다. 미술 대학을 떠나 자신의 스타일과 예술계에서 자신이 갈 경로를 선택하는 일이 헬싱키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하는 일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대략 20개의 플랫폼이 있고 각 플랫폼마다 대략 10종의 버스가 있다. 미술 대학을 졸업한 야심만만한 어느 젊은이가 버스를 골라 오른다. 한 세 정거장쯤 지나서(각 정류장은 그의 경력에서 1년을 의미한다) 그는 버스에서 내려 어느 갤러리로 들어가 자신의 작품을 보여 준다. 그걸 본 사람들은 “오, 아주 좋아요, 아주 좋아. 그런데 마틴 파가 좀 생각나네요.” 하고 말한다. 그러면 그는 “으악!! 난 독창적이지 않아. 난 독특하지 않아!”라며 잔뜩 의기소침해진다. 그래서 택시를 잡아타고 다시 버스터미널로 가서 다른 버스에 오른다. 그리고 당연히… 똑같은 일이 또 벌어진다. 밍키넨은 말한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 뭣 같은 버스에 계속 남아 있는 거야!”

예술계란 신랄함이 왕왕 기승을 부리는 곳이고, 그런 신랄한 분위기는 창조적 충동 같은 섬세한 유기체를 갉아먹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창조적 에너지 덩어리를 보호한다. 위악적 냉담의 아이러니로 만든 방패와 짓궂음의 투구와 익살맞음의 흉갑으로 그것을 지킨다. 그리고 신중하게 벼린 냉소주의의 칼날을 휘두른다. 해가 가도 내가 계속 일할 수 있게 유지해 주는 나의 그 부분은 세상의 매서운 눈매에 완전히 내놓기에는 너무 상처 입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대 예술 작품을 마주할 때 아직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면, 내가 종종 활용하는 사고 운동을 시도해 보시라. 1세기쯤 지나서 누군가가 그 작품을 감정받으려고 22세기판 〈진품명품〉에 내놓았을 때 어떤 대화가 오고갈지 상상해 보는 것이다. 나는 이 방법으로 톡톡히 효과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