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 현재의 탄생
엘리사베트 오스브링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시간은 새로운 시대, 즉 '현재'를 향해 돌아가기 시작한다. 변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은 몇 년간 진동한다. 사람들은 사라진 집을 찾아 떠돌고, 바다 건너 불확실한 미래로 나아가려 한다.
1947년.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되었다. 전범 재판에 대한 관심은 시들고 냉전의 열기는 타오른다. 자동소총 AK-47이 등장하고, 크리스티앙 디오르가 '뉴룩(New Look)'을 선보인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제2의 성>을 썼고, CIA가 창설되었다. 이집트 시계공의 아들은 오늘날까지 이어질 지하드를 선포한다. 이스라엘 건국을 목전에 두고 UN 위원회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빌리 홀리데이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동시에 마약 투약 혐의로 수감된다. 조지 오웰은 <1984>를 탈고했고, 프리모 레비의 회고록이 출간 준비에 돌입한다.
이 책은 현대의 태동을 복기한다. 정치, 사회, 문화의 격변기이자 분수령이 된 해. 이후 70년 이상 전 세계 사람들의 삶을 지배할 힘들이 그때 처음 등장하면서 역사의 흐름이 바뀌고 현대사회가 물꼬를 튼다.
책속에서
빈곤과 굶주림과 두려움으로 고통 받는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배급표와 의류 쿠폰에 쏠려 있다. 크리스티앙의 세포 하나하나가 이런 현실에 반기를 든다. 그는 자주색과 태피터로 세상을 폭파하고 싶고, 새롭게 세공한 다이아몬드로 현실을 해석하고 싶다. 조만간, 직물이 아닌 실오라기 단계에서 이미 꼭 알맞은 색으로 염색을 마친 실크를 통해 꿈을 실현시킬 것이다.
2월 13일, 그는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된다. 한 번의 패션쇼, 언론 발표, 스물네 시간.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렇게 뉴룩이 탄생한다. 여성들이 그의 부티크에서 치수를 재고 기록을 남겨두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린다.
_2월, 파리
네덜란드에서는 그 누구도 ‘독일’이라는 단어조차 입에 올리려 하지 않는다. 독일에 점령당했던 이후로 이들을 향한 매우 강한 적개심이 존재한다. 새로운 법이 통과되면서 독일 혈통을 지닌 2만 5000명의 네덜란드 국민들이 ‘적대적 대상’으로 낙인 찍히고, 국외로 강제 추방 된다. 유대인이나 자유주의자, 반反나치주의자도 예외는 없다.
폭력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네덜란드계 독일인들은 한 시간 안에 자신들이 가져갈 수 있는 모든 짐을 싸야 하는데, 이때 짐의 무게는 50킬로그램을 넘으면 안 된다. 그런 다음 이들은 교도소나 네덜란드와 독일의 국경 근처에 있는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지고, 추방될 때까지 그곳에서 생활한다. 이들의 주택과 사업체는 국가에 몰수된다. 이렇게 ‘검은 튤립 작전’이 진행된다.
그런 다음에는? 평화가 찾아올까? 깨끗이 정화되었다는 느낌이 들까?
_2월, 네덜란드
전쟁이 끝나고 2년이 흐른 지금 전범 재판에 대한 영국의 뜨거웠던 관심이 수그러들고 있다. 영국이 감당해야 할 비용이 너무도 크다. 게다가 정치적 우선순위에서도 밀려나기 시작한다. 소련과 미국 사이에 이념적 권력투쟁이 시작되면서 독일을 바라보는 관점에 변화가 찾아온 참이다. 과거에서 미래로 초점이 옮겨 간 특정 날짜나 정확한 시점은 없다. 그저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명확한 목표 없이 끊임없이 흔들리는 1947년이 있을 뿐이다. 모든 가능성의 문이 열려 있는 해.
영국인은 생각한다. 독일을 와해시키는 작업을 중단할 때가 온 것은 아닐까? 죄책감과 처벌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기억과 역사의 기록, 피해자들을 위한 정의가 정말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일까? 가혹하게 처벌받는 독일이 아닌, 어느 정도 방패와 방어벽의 기능을 하며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독일이 오히려 유럽에 필요한 것은 아닐까?
이런 이유로, 올해 영국의 독일 점령에는 새로운 목표가 생긴다. 독일이 ‘안정적이고 생산적인’ 국가로 거듭나도록, 이를 위해 과거의 실패와 범죄가 아닌 재건과 미래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일에 주안점을 둔다. 결과적으로 영국은 기소 건수를 줄이기로 결정한다.
_2월, 독일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가 실행 가능하고 종교적으로 인정되는 것이라면, 누군가는 이주를 하거나 죽어야 한다. 마을이 공격을 당하고 불길에 휩싸인다. 열차가 기습을 받아 승객들이 칼에 찔린다. 난민 행렬이 습격을 받는다. 남성은 거세를 당하고 여성은 납치되어 성폭행을 당한 뒤 가슴이 절단된다. 납치된 여성만 최소 7만 5000에 달하며, 이들이 속한 집단을 약화시키고 굴욕감을 안겨줘야 한다는 이유로 그들은 성폭행의 대상이 된다. 어떤 집단은 적이 여성들을 잡아가기 전에 자신들의 손으로 살해하는 편을 택한다. 아버지가 딸과 여자 형제, 아내의 목을 칼로 긋거나 불태워 죽인다. 펀자브의 우물은 자결을 강요받은 여성들의 시체로 채워진다. 라왈핀디 지구에 속하는 작은 마을 토하 칼사에서 아흔세 명의 여성이 마을의 공동 우물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들 중 세 명이 목숨을 건지는데, 아흔셋 모두 빠져 죽기에는 물이 충분하지 않아서다.
_5월, 델리
5월 24일, 빌리 홀리데이는 올해 들어 두 번째로 뉴욕의 카네기홀에 선다. 그의 노래
에 관중은 열광한다. 나흘 뒤 경찰이 그의 아파트를 수색하고 마약 소지 혐의로 기소하면서 홀리데이는 판사 앞에 서게 된다. 이 재판은 ‘미합중국 대 빌리 홀리데이’라 불리고, 홀리데이 또한 정확히 이렇게 느낀다. 피고인 측 변호사가 없는 상황, 육체적으로 지쳐 있는 데다 갑작스러운 약물 중단으로 인한 불안과 탈수증으로 괴로워하면서, 그는 유죄를 인정한다. 5월 28일, 빌리 홀리데이는 1년의 금고형을 선고받는다.
_5월, 뉴욕
시계공인 아버지를 빼면,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하산 알-반나가 조직한 무슬림형제단의 비밀을 그 초창기부터 알았다. 두 개의 주요 단어가 공유된다. (…) 또 다른 주요 단어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힌 채 천년의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단어, 바로 '지하드'다. (…)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의 수가 증가하면서, 시계공 아들의 시선은 탄압받는 이집트의 국경 너머로까지 확장된다. 하산 알-반나는 유대인이 이슬람을 증오하고 있으며 모든 무슬림이 연령과 성별에 상관없이 유대인의 음모와 증오에 저항할 의무가 있다고 선언한다. 지하드가 선포되는 순간이다. 탄압이 있는 곳마다 이를 깨부수고, 탄압받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사람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그의 목적이다.
_5월, 카이로
6월 10일, 북유럽보험회의는 조속히 새로운 불가항력 조항, 이른바 '포스 마주어(force majeure)'를 도입하기로 결정한다. 원폭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는 배상금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_6월, 오슬로
라파엘 렘킨은 제노사이드를 국제범죄로 인정받기 위한 힘겨운 투쟁에 모든 것을 걸기로 마음먹는다. 첫 번째 뉘른베르크 선고 이후 그가 느낀 환멸에 더하여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많은 친척이 살해당했다는 고통스러운 진실이 모여 단 하나의 결심이 세워진다. 세상의 악을 유폐하자.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UN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워싱턴에 있는 직장에 사표를 내고, 그러니까 연봉 7500달러를 포기하고, 맨해튼 102번가에 있는 우중충한 셋방으로 이사한다.
일정한 직업이 사라지면서 수입도 함께 사라진다. 닳아 해지고 구멍 난 곳을 헝겊으로 덧댄 옷, 이동 경비와 우표값과 방세를 지불하기 위한 끊임없는 분투. 이제 이것이 그의 현실이다.
(…) UN 대표들의 마음속에는 죄책감이 존재한다. 렘킨은 이를 감지하고, 움켜잡고, 자신의 화폐로 만든다. 이를 이용해 지원과 서명을 받아내고, 오직 대의만을 위해 최대로 활용한다.
파나마와 쿠바가 제일 먼저 그의 제안을 지지한다. 렘킨은 인도 대표의 지지도 이끌어낸다. 다음으로 그는 기자들에게로 관심을 돌린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UN 기자실에서 이들을 붙잡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자들은 샌드위치와 낡은 서류 가방을 든 그의 모습이 복도에 나타날 때마다 슬쩍 피하기 시작한다.
_6월,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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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우리를 만든 시간, [1947 현재의 탄생]
다음주 월요일(11/25) 저녁 8시, 겨울서점 채널에서 책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를 주제로 라이브를 합니다. 미리 읽어오시면 더 많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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