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읽는 것은 쓰는 것보다 낫다고도 부족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창조적인 행위이다. 작품을 쓰는 것은 작가의 역할이지만 완성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작품은 작가만의 것이 아니다. 글을 다 쓰고 난 시점에서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간다. 글은 쓰는 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고 독자들이 읽음으로서 결실을 맺는다. 독자들이 읽어야만 비로소 영혼에 말을 건네는 무형의 언어가 되어 세상으로 나간다. 독자는 작가와는 다른 눈높이에서 작품을 읽고 다른 뭔가를 창조해낸다. 작가는 자신이 무엇을 썼는지 작품의 전모를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아는 것은 언제나 독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한순간을 살기 위해서 커다란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거창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 한 순간을 어떻게든 견뎌냈기에 지금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고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절망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을 때 그는 전율에 가까운 공포와 동시에 아주 미세하기는 하지만 죽음에 대항하려는 힘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이와사키는 희미하지만 중요한 인생의 부름을 흘려듣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생은 그에게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절망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희망이 숨어 있다고 말을 한다. 실망을 삼키고 희망이라는 빛으로 바꾸어 내면의 용자를 깨운다.
읽는다는 것은 표기된 글자를 해석하는 게 아니라 글자를 통해 그 진의의 깊이를 느끼는 것이다. 쓴다는 것은 미지의 타인에게 ‘말’을 전하는 행위이다. 언어란 ‘말’의 한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철학자인 이즈쓰 도시히코는 만년에 ‘말’이라는 단어를 쓸 때 한자인 ‘고토바(言葉)’라고 쓰기도 하고 가타카나인 ‘고토바(コトバ)’로도 썼다. 보통 한자로 쓰지만 그는 일부러 ‘고토바(コトバ)’라고 표기함으로써 한자의 의미에만 한정하지 않고 그 너머에 있는 살아 있는 많은 의미를 전달하려고 한 것이다. 이즈쓰가 생각하는 ‘말’에는 수많은 모습이 포함되어 있다. 화가에게는 색과 선, 음악가에게는 선율, 조각가에게는 형태, 종교인에게는 침묵이 가장 완벽한 ‘말’이 된다. 괴로워하는 친구 곁에서 아무 말 없이 그저 같이 있어줄 때의 침묵도 ‘말’인 것이다.
독자란 작가가 들려주고자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다. 작가도 느낄 수 없었던 진정한 의미를 각자의 언어로 이야기의 심층까지 발견해내는 존재들이다. 이러한 고유의 역할이 독자들에게 위임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책을 펼칠 때마다 몇 번이고 상기해야 한다. 또한 문학이란 유리책장에 장식으로 꽂힌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영혼 속에서 벌어지는 단 한 번뿐인 경험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기억에 남는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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