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에서
여기도 서울인가? 어디까지 서울인가? 인위적으로 구획된 행정 구역인 서울특별시 안의 지역들을 걷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나? 나는 왜 우연히 탄생한 것일 뿐인 행정 구역 서울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걸까?
오늘날의 서울이 1963년에야 지금의 형태를 띠게 된 것처럼, 현재 서울의 역사라는 것도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만들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와 같은 형태를 띤 서울특별시는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올바른 서울의 역사〉란 것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제까지 서울을 말해 온 사람들이 조선 시대 궁궐과 왕릉, 양반의 저택과 정자들을 주로 거론해 온 것은 대단히 편협한 귀족주의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모든 옛 책이 동일하게 귀중한 것과 마찬가지로, 서울 속의 모든 공간과 사람도 동일하게 가치 있는 존재들입니다.
양천 향교는 양천구가 아니라 강서구에 있습니다. 사대문 가운데 동대문은 동대문구가 아니라 종로구에 있구요. 옛 시흥군은 지금의 시흥시와는 무관하게 서울 금천구 시흥동이 중심지였고, 매동 초등학교는 현재필운동에 있습니다. 명실상부하지 않은 지명이 많은 것 또한, 서울의 역사가 매우 복잡하다는 사실을 증언해 줍니다.
현대 〈서울〉의 대부분은 1936년과 1963년 이후 〈서울〉이라 불리게 된 지역들입니다. 그리고 서울 시민의 절대 다수는 이들 지역에 삽니다. 조선 시대까지의 사대문 안 한양의 역사와 문화는, 저를 포함한 이들 새로운 서울의 시민들과는 무관합니다.
서울의 백제 유적이 파괴된 것은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도 아니고, 임진왜란 때도 아니고, 식민지 시대도 아니고, 바로 우리 한국인들이 정부를 세운 현대 한국 시기였습니다. 현대 한국, 현대 서울에 이렇게까지 유적.유물이 남아 있지 않은 책임의 일부는 바로 우리 현대 한국인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 책임을 회피하면 안 됩니다.
식민 잔재라고 말해지곤 하는 서대문 형무소와 안산 선감 학원도, 사실은 식민지 시대에 이용된 기간보다 현대 한국 시대에 이용된 기간이 더 깁니다. ……국민의례, 국민 교육 헌장, 반상회, 국가 보안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제도들을 일제 잔재라고만 해버리면, 현대 한국 시대에 이 제도들에 의해 피해받고 심지어 는 목숨까지 잃은 사람들의 존재가 지워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5학년으로 전학 간 안양 남초등학교에서는 〈다가오는 이천 년의 새 날이 오면〉으로 시작하는 경기도민의 노래를 배웠습니다. 경기도에서는 도민의 노래를 배운다는 사실을 알고, 서울에서 막 전학간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서울에서는 서울 시민의 노래 같은 걸 배우지 않는데, 왜 경기도에서는 경기도민의 노래를 배울까?〉 서울과 서울 주변 지역은 왜 이렇게 다른가. 이런 고민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청계천은 오늘날의 서울이 시작된 지점입니다. 청계천 남쪽에는 19세기 말에 일본인들의 신도시가 만들어졌고, 북쪽에서도 오늘날 〈북촌〉의 원형이 만들어집니다. ……북촌 한옥은 조선 시대 양반들의 집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 중산층 조선인들의 〈마이홈〉이었습니다.
1960년대에 청계천 빈민들을 동남쪽 광주대단지로 이주시킨 서울시는, 21세기 들어 또 다시 청계천 상인들을 동남쪽 성남시와의 경계 지역으로 보냈습니다. 자신들이 보기 싫은 존재를 서울 경계 지역으로 보내 버려서 눈에 띄지 않게 한다는 심리는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았습니다.
〈남작 하야시 곤스케 군 상〉이라는 글자가 거꾸로 보이게 세워져 있는 것은 식민지 시대의 부정적인 유산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배치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지만, 이렇게 배치함으로써 통쾌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겠습니다.
경성 호국 신사가 세워진 것은 1943년입니다. 그러니까 2년 정도만 운영되다가 한반도가 해방되면서 폐기된 것이지요. 그 후, 경성 호국 신사의 빈 땅에 월남민들이 정착하면서 해방촌이라는 공간이 만들어졌고, 지금도 해방 예배당이라는 종교 시설이 건재하여 당시의 상황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줍니다.
오늘날 서울 시내 각지의 역사적 인물을 발굴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는 와중에도, 을축년 대홍수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땅을 주고 집과 학교를 지어 준 김주용 선생과 그를 추모하는 비석은 여전히 잊혀져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일부 세력은 〈친일파〉라는 칼을 너무나도 쉽게 휘둘러 역사를 왜곡하고 망각시키고,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낙인찍습니다.
1930년대에 공업 지대로서 발전한 영등포는 1936년에 경성에 편입됩니다. 그 후 영등포, 노량진, 흑석동은 〈강남〉이라 불리게 됩니다. 용산에서 남쪽으로 한강 인도교와 한강 철교를 건너면 다다르는 곳이니, 한강의 남쪽인 강남이 맞지요. 지금도 강남 아파트, 강남 중학교, 강남 교회를 비롯해서 강남이라는 단어가 붙은 시설과 업체를 영등포와 그 주변 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청계천 한복판에 공장들이 있을 때는 1970년의 전태일 분신 때처럼 노동자들의 문제가 즉시 시민들에게 전달되었지만, 1985년에 서울 서남쪽의 구로 공단에서 동맹 파업이 일어났을 때에는 파업의 배경이 되는 노동자들의 실상이 대다수의 서울 시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공단을 서울의 끝에 세운 의도는, 단순히 혐오 시설을 서울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데에 두려고 한 것 뿐 아니라, 노동자와 일반 시민을 떨어뜨려 놓기 위함이기도 했습니다.
현대 한국의 변화가 서울의 끝에서 시작되기에, 그 변화의 주체들과 함께 하는 종교 세력들도 서울의 끝에 자리한 경우가 많습니다. ……해방촌의 해방 예배당이나 을지로의 영락 교회가 1945년 8월 이후 북한 주민들의 남한으로의 이주를 상징한다면, 한강 남쪽의 이들 종교 시설은 서울이 남쪽으로 확장되고 지방민이 서울로 이주.정착한 과정을 잘 보여 줍니다.
1978년에 인천 서쪽에서 일어난 동일방직 사건과 1979년에 서울 동쪽 끝 면목동에서 일어난 YH무역 사건, 그리고 1980년대에 서울 동쪽의 구리시에서 일어난 원진레이온 사건은 서울 중심부에 충격을 주었고, 그 충격은 이윽고 한국 전체를 뒤흔들게 됩니다. 그 변화의 주인공은 〈아무 것도 아닌〉 우리 시민들이었습니다.
〈구로 공단〉이라는 이름은 〈구로디지털단지〉, 〈G밸리〉로 바뀌고, 〈가리봉역〉이라는 이름은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바뀝니다. 〈가산〉은 1963~1970년 사이에 존재한 지명이기는 했지만, 〈가리봉〉이 훨씬 오래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리봉〉과 〈독산〉을 합친 인공적인 지명인 〈가산〉이 〈가리봉〉을 대체한 데서, 저는 모종의 의도를 느낍니다.
서울특별시에 속해 있지만 옛 사대문 안이 아닌 지역에 살고 있는 시민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사대문 안의 〈진짜 서울〉, 〈궁궐의 도시 서울〉에서 찾기 위해 한강 너머 사대문 안을 바라볼 뿐, 자신들이 바로 지금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키 낮은 단독 주택들과 빌딩들의 군집 속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들이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은, 유럽.일본의 성곽 도시와 주변 공간을 연상케 합니다. 그 공간의 중심에 자리한 아파트 단지는, 그 일대의 옛 공간과 주민들에게 위압적으로 근대화, 또는 한국인들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서구화를 강제하는 〈혁명군〉이라고 부를 수 있을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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